아기와 살아남기

돈이 뭐길래..

민토리_blog 2017. 5. 11. 06:08

몇달 전쯤에 난데없이 한국에서 문서가 하나 날라왔다. 열어보니 내 이름 앞으로 된 땅과 건물이 재개발에 들어간다고 보상 내역에 관한 안내문이였다.

그 안내문이 뜬금없었던 건, 도대체 그 땅과 건물이 뭔지 전혀 짐작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몇번의 국제전화와 인터넷 조사 등등을 통해 알게된 건 대략 30년전의 과거. 얼굴도 본 적 없고 아무런 기억조차 없는 할머니라는 존재가 2년전 쯤에 돌아가시면서 문서상의 손녀라는 이유로 내게 상속되어진 지분들.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된 순간 내게 들었던 감정은 꽤나 복잡한 것이였다. 그리고 그 중 나도 놀랐던 감정 하나는, 희망.


공짜 돈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그 쪽 가족들 중 누군가 날 기억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혹시라도 그 할머니란 분이 나를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가 이렇게 마지막에서나마 내게 어떤 메세지를 보내주시는 거 아닐까. 너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물론 아무리 정황을 살펴봐도 어떤 유언의 메세지도 없었고, 그 쪽 가족들 역시 잠잠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단걸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솔직히 조금은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원래 받지 못하고 살아왔던 삶에 익숙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게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을 때도 그닥 실망하려 하지 않았고, 어차피 한국에서 나와 있는 나니까 당연히 한국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기려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서운했었다.


너는 영국에 있으니까, 네 이름으로 모아둔 이 돈을 지금 다른 가족을 위해 쓰면 안되겠니? 나중에 꼭 다시 챙겨넣어주마.


그랬던게 아버지 돌아가시기 바로 일년 전 일이다. 물론 아버지의 그런 약속은 남은 가족들에게는 아주 무의미하고 가능하다면 고려조차 하고 싶지 않은 말이였기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남겨진 것 하나 없이 그저 장례를 치르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허전하고 외로웠다. 그나마 한국과 연결되어 있던 내 선 하나가 가위로 탁, 하고 잘라져버린 것 마냥.


그런데 그토록 잊고 싶어했던 과거의 순간이 갑자기 나타나 내게 '사실 너에게 줄게 있단다' 하고 말을 걸다니! 사실 돈의 액수만을 따지면 그닥 '우와' 할만한 수준도 아니지만.. 그런 것 보다, 나도 어딘가 가족마냥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 들떴던 것 같다.... 그래, 그렇게 케케묵은 상처도 치유되고 공돈도 생기고, 나름의 해피엔딩이라고 마무리 짓고 넘어 갈 수 있으면 오죽 좋으련만....


한국의 가족에게 날 찾는 전화가 왔단다. 이름 모를 할머니의 가족, 즉 정상적이였다면, 내가 가족이라 불렀을 어떤 사람에게서. 예상했듯이 상속은 유언없이 법대로 나눠진 거 였고, 그걸 뒤늦게 깨달은 가족들의 연락이였다. 돈을 내놓으라고. 자기들은 오랜 시간 동안 조상들 모시며 살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고 상속도 제대로 안되고 집도 재개발 되는 상황에서 다들 상속분을 양보하고 나누고 있는데, 이렇게 아무 연락도 없이 남처럼 살던 내가 이제와 돈만 덜컥 받아가는게 말이 되느냐고. 그러니 이제라도 돈을 다 줄 수 없으면 어느 정도는 내 놓으라고.


허허허.. 그럼 그렇지. 인생이 그렇게 내 맘대로 상처 치유하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지. 웃음이 나는데 울음이 나는 기분이다. 참.. 돈이 뭐길래. 아버지 때는 서운한 생각이 들 때,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차라리 잘되었다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잘 지내는게 낫지, 내가 한국에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내 몫을 달라고 하나, 염치없다, 그렇게 나름 생각하며 마음을 다 잡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기 싫다. 처음 '혹시나'하고 희망을 가질 때, 어쩌면 잊혀진, 아니 내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 그 다른 쪽의 가족들을 만나, 내 과거를 다시 마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레임도 가졌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소리를 치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들은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알긴 하느냐고. 안다면 지금 이 돈 내놓으라는 소리 못한다고. 내겐 이 돈이 손해배상금 같으니 절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물론 생각뿐이지, 직접 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차라리 그냥 묻어둘걸. 괜히 꺼내가지고.. 이렇게 마음을 다시 휘젓고 상처를 벌려놓는구나. 우습지 나도. 그 돈이 진짜 화해의 손길이라고, 희망의 증표라고 믿었으니 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