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를 받으면 끊임없이 머리속을 뭔가로 채우고 싶어진다. 채우다가 채우다가 더 못채우면 그 때는 손으로 내뱉아내야 한다. 글이 되었든 그림이 되었든...
그래서 할 일은 많은데 소설을 손에 잡고 놓지 않거나 만화를 본다. 이럴 때 영상매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건 내가 머리속으로 집어 넣는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들어와지는 것 같아서 '채운다'는 주동적인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에 그렇게 글을 쓰고 난 후 감정의 널뛰기를 했다. 또다시 연락이 왔었다는 얘기에 전화를 끊고 한바탕 울음을 쏟아냈고, 그러고 나면 좀 흘러내려갈 것 같았던 감정이 도리어 막힌 구멍이 뚫였다는 듯 더 차고 흘러나와 그저 어찌하지 못하고 숨기다가, 폭발하다가, 그런 상태를 유지했다. 거기에 갑자기 닥쳐온 마감들. 끊이지 않는 학생들의 과제물 채점, 확인, 프로젝트 계획안 마감, 학회지 논문 마감 등등 마구 마구 닥쳐와서... 머리는 터질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자꾸 허한 기분.. 그래서 조금만이라도 틈이 나면 폰으로 만화를 봤다.
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웹툰 서비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글도 좋아하고, 그림도 좋아하기 때문에 만화는 내게 있어 최고의 조합이다. 한번 보면 끝을 보는 편이기 때문에, 보통 완결된 걸 중심으로 찾아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다음 만화에 있는 이림 작가의 작품을 다 골라봤다. 그럴 수 있었던게, 이 분의 작품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유료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선택한 이유도 있지만.. '하윤의 죄'를 보고, '죽는 남자'를 보고, 마지막으로 'R에 관해서'를 읽었는데... 그녀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1학년, 1번이였던 그녀다. 작은 몸집, 동그랗고 예쁜 얼굴.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수줍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던 그녀. 그 때 반 아이들의 이름과 번호를 다 외우고 있었는데..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알고, 그녀가 눈에 띄긴 했지만, 그렇다고 별로 다가가야 할지 말지, 그냥 존재만 신경쓰이던 그녀. 그녀는 3번이였던 다른 친구와 친해진 듯 했고, 그런 그녀와 처음 말을 하게 된 건 어느 미술 시간. 야외 수업을 위해 밖에 나와서 수선화를 그리겠다고 앞에 앉아 있는데, 1번과 3번 그녀들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사실 1번 그녀는 내게 관심이 없는 듯 했고, 3번 그녀의 주도로 왠지 억지로 옆에 앉아 있는 듯 보였지만... 그렇게 말을 튼 후 서서히 친해지다가, 어느 순간 보니, 난 1번, 3번, 12번, 13번 그녀들과 친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행계를 했고, 돈을 조금씩 모아 한달에 한번씩 새벽기차 등을 타고 여행을 갔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고, 나를 제외한 그녀들 모두 문과로 가면서 서로가 멀어지고, 고등학교 2학년은 내게 꽤나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난 그녀들과 만나길 포기했었다.
그런 모든 순간들을 지나면서도 1번 그녀는 내게 남아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있던 아픔이 내게 위로가 되었고, 적어도 그녀는 나를 이해 할 수 있을 거라고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와 비슷한 시기에 어쩌다 다른 친구에게 이끌려 가게된 교회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면서, 당신도 꽤나 힘든 삶을 살았군요, 하고 나름 위로받았던 것처럼.. 나는 그녀에게 거의 모든 걸 말했고 나눴다. 그녀는 잘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때때로 전해주는 편지나 노트가 좋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는 사라졌다. 잠수했고, 만나지 않았고, 피했다. 나는 기다렸고, 다가갔고, 돌아오면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그녀는 많은 순간 잠수했다. 그리고 돌아오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고,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괜찮았던 것 같다. 그래도 그녀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많은 잠수를 통해서 다른 친구들이 멀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녀와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영국에 나와서도 난 때로 장문의 메일을 보냈고, 힘들었던 유학생활 도중에 그녀의 답장은 내게 위로가 되고, 평안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잠수가 이어졌다. 거의 2년이 넘도록이였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결혼식 절차도 없이 혼인신고를 하고, 혼자 남고, 아이를 가지고, 다시 혼자 육아를 견디고, 그런 모든 시기 중에 때로 못견딜 때면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고, 메세지를 보내도 답이 없었다. 메일은 블랙홀로 끌려간 것마냥 돌아올 생각은 없어보였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거의 지쳐버릴 만큼 지쳐있다가, 한국에 들어가기 하루 전에 보낸 메일에 드디어 그녀의 답이 왔다.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면 만나자며... 기분이 묘했다.
너는 그 동안 거기 있었니? 거기 있으면서 나를 모른 척 했니?
그런 질문이 머리속을 채웠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많이 변해 있었다. 그런데, 그걸 보고 나는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보고 웃는데, 나는 다시 마주 웃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를만큼 그녀를 잊어버렸다...
그런 그녀가 새삼 'R에 관해서'를 읽고 나서 떠올랐다. 우리는 남자로 얽킨 사이도 아니지만 (물론 내 곁의 남자들 중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 그리고 뭐라 딱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 인생 거의 3분의 일을 지탱하던 그녀가.. 이렇게 싶게 내 인생에서 지워져 있었다는 생각에 순간 놀라서...
나는 언제고 너를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년이 지나 네가 다시 찾아오더라도, 말없이 그냥 받아주고, 예전처럼 느낄 수 있게 해줄, 그런 너의 안식처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다시 내게 올거라고. 내가 너를 주저없이 사랑한다, 라고 말 할 수 있을 만큼, 너로 그럴 거라고. 다만 넌 지금 뭔가 사정이 있어서, 힘들어서,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라고... 그런데 잘 모르겠다. 너도 혹시 내가 물어주길 바랬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너의 문을 두드려 주길 바랬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난 너에게도 차단해야할 세상의 한 부분이였던걸까. 아니, 혹시 따지고 보면 문을 닫는 건 나였나? 하긴 떠나온 건 나니까.. 너는 거기에 있었는데... 한 곳에 있는 걸 견디지 못하고 이곳 저곳 떠돌았던 건 나니까...
나는 너에게 이제 메일을 쓰지 않는다. 감정이 소용돌이쳐서 도대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혼자 울 때도 이제는 네 전화번호를 누르지 않는다. 아니, 네 이름 세자가 머리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너는 나를 기억할까? 넌 내가 알고 지내온 사람들 중 유일하게 이 블로그가 나의 것이란 걸 알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너는 내게 글을 남기지 않는다. 너는 내가 아직도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니? 예전에는 네게 메일로 쓸법했던 글들을 여기에서 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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