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김치를 담그려고 한국 수퍼마켓에 남편과 함께 들렸다. 고춧가루와 이런저런 것들을 담고 배추를 골라 담고 있는데, 어린 (내 눈에 어린, 그래봐야 20대초반 대학생 정도겠지?) 영국인 남자가 걱정어린 투로 옆에 서있다가, "Are you going to take all?" 하고 묻는거다. 그래서, "No, why? Do you want some?" 하고 되물으니, 자기는 배추 2통이 필요하단다. 밖에 나와 있는게 7통이였는데, 원래 5통을 살려고 좋은 걸 살피고 있었던 터라, 걱정말라고, 난 5개밖에 필요하지 않으니, 2통은 남는다고. 그리고 아마 주인에게 물어보면 더 있을거라고 대답해주니, 안도하며 웃는다. 그 웃음이 천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 '아줌마'스러움이 발동해서 그런지, 바구니에 무우도 담았길래, 혹시 김치를 담그려 하냐고 물으니 맞단다 ㅎㅎㅎ;; 뭐랄까... 젊은 영국인 남자애(는 사실 아니고;;) 청년?이 김치를 담그려고 무우와 배추를 고르고 있다니!! 그 모습이 생소하기도 하고, 묘하게 기특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해서, 자꾸 눈이 가다가 아주 열심히 포스트잍을 보며 쇼핑을 하고 있길래, 다시 말을 걸었다. 김치 만들 때 필요한게 뭔지 다 찾았느냐고.. 그랬더니 다시 그 수줍은 미소를 띄우며 뭔가 빽빽이 적힌 그 포스트잍을 살짝 보여줬다... 아, 그래, 당연히 알고 있겠지, 나도 참 주책이네, 하는 생각을 하며 민망해 하려 하는데, 다행히 남편이 농담을 던져줘서 나도 웃고, 그도 웃고, 다들 웃으며 잘 마무리하고 나왔다;; 그렇게 나와서 남편이 하는 말이, 설마 저 남자가 진짜 자기 혼자 김치를 담그려고 여기까지 왔겠냐고, 당연히 한국인 친구나 여자친구가 있어서 온거 아니겠냐고 하는거다..
그제야 마치 머리속에 종이 울리듯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그가 잠시 보여준, 살 것들이 잔뜩 적힌 그 포스트잍의 영어들도 영국인의 필체는 아니였으니까... (어찌보면 당연한건데, 알파벳권 나라에서 온 학생들의 필체와 동양권 나라에서 온 학생들의 영어 필체는 달라서, 필체만으로 가끔은 학생들의 국적을 짐작할 수 있을 때가 있어요;;) 친구들 사이에 그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일은 드물테니 아무래도 여자친구가 아니겠나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추측상의) 한국분이 자기가 고르면 더 빠르고 정확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역시 추측상으로) 영국인을 보내 사야했을 이유가 뭐였을까도 짐작해봤다. 지독히 개인적인 짐작으로 생각해본 시나리오들은.... 첫째, 그 분이 한국수퍼마켓에 올 시간/여건이 되지 않았다, 둘째, 그 영국인이 자기가 혼자 쇼핑해보고 싶다고 졸랐다, 셋째, 그 분은 한국수퍼마켓에 가기 싫어했다... 등등.. 뭐 그냥 혼자 망상이긴 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국제연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소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대책없이 번져버린 경우죠 ㅎㅎㅎ;;;;)
나같은 경우, 한국인이 아닌 남자와 결혼을 하고 한국이 아닌 외국에 나와 살고 있는 까닭에 '국제결혼'의 예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흔히 알고 있는 국제연애의 면들 - 예. 장거리 연애, 새로운 타지생활, 문화 경험, 한국에서 국제연애 커플로 지내보기, 등등 - 을 겪어보지 못한 경우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알고지낸 사람들, 친구들, 가족들을 통틀어서도 거의 나 혼자 외국에 나와 있는 검은 양 같은 존재라, 영국에서 살아온 12년이 넘는 시간동안에도 한국에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5명이 안될 정도로 정말 혼자 타지 생활을 이어나갔고, 혼자 여행을 다녔고, 혼자 알아서 생활 터전을 만들어 나갔다. 여기서 살면서도, 한인사회에 적극적으로 발을 들인 적도 없고, 딱히 한국사람을 찾아 나선 적도 없는 까닭에 이렇다할 친한 한국 사람 친구도 주위에 없고, 이곳에서 만나고 친해진 외국인들도 대부분 한국에 대해 별 감정도 관심도 없던 사람들.... 그러다보니, 주위에 다른 국적의 국제연애 케이스들이 있긴 해도, 솔직히 블로그를 하기 전까지는 다른 국제연애를 하는 한국인분들도 만나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 국제연애를 하는 한국분들은 나와는 다른 차원에 사는 분들 같았으니까.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그런 세계. 말이다..
특히 유학 초반에 외국생활의 '외'자도 제대로 모르고 버벅거리던 그 시기에,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생김새도, 얼굴색도, 말투도 다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든 어울려 보겠다고 아둥바둥거릴 때, 그 때 이런 저런 실수? 오해 섞인 경험들을 한 다음부터, 사실 외국남자들과는 실수로라도 눈웃음 하나 날리지 않으려고 벽을 쳤었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는, 공대에 있었던 까닭에 사실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어울려 놀때가 훨씬 많았고, 또 그게 편하기도 했다. 학부 20대 초반을 나는 대부분 남자아이/선배들과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강의실 밖에서 농담따먹기를 하고, 청바지에 실험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그러며 보냈으니까... 그래서 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도 그게 그대로 통할 줄 알았다. 확실히 남자들과 대화를 시작하는게 여자들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 쉽고 편하게 흘러갔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시작된 관계가 절대 한국에서의 '농담따먹기'하는 '친구/동기' 관계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아주 빨리 깨달았다;; 특히 어느 모임이나 술자리 같은 곳에서 그런 식으로 뭔가 통한다 싶어 서로 웃음을 주고받고, 대화를 주고 받고 하다보면, 그 모임이 끝나기도 전에, '어이쿠, 이게 아닌데, 얼른 분위기 전환하고 도망가야겠다;;;'하고 생각하게 된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였으니까.. 그래서 어느 순간 부터, 선을 긋는걸 알게 모르게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도리어 일단 무조건 여자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럼 도대체 어쩌다가 지금까지 오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에서와 비슷한 패턴을 밟아서 첫 영국인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었다. 그러니까, 나같은 경우, 소개팅이나 미팅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고, 첫만남에 막 반하고 그런 경우도 없어서, 보통 친구 사이가 오래 유지되다가 어느 순간 연인으로 발전되는데... 그 영국인친구와도 그랬다. 우리는 같은 박사과정에 있었고, 이미 1년 넘는 시간을 통해 친구로 친해져있었고, 그러다 어느 순간 같이 파티 끝나고 집에 데려다주는 시간들이 생겼고, 같이 둘만 밥먹으러 가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는 순간들도 생겼고, 서로 기다려주는 게 당연해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인 같아져 있었다. 한국에서도 기념일같은 걸 챙겨본 적이 별로 없던 까닭에 영국 친구와 만날 때도 우리가 언제 어떻게 정확히 '우리 오늘부터 1일'이란 순간이 생겼는지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그냥 어느 순간 우리는 같이 있는게 당연해졌고, 주위 친구들도 그런 우리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정확히 따지면 '국제연애'를 시작하게 된 초기에도 내가 사실 '국제연애'를 하고 있다, 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시작이 딱히 다르지도 않았고, 굳이 외국인이라 끌렸던 것도 아니고, 생소하지도 않았고, 그 때는 이미 영국생활에도 어느정도 적응해 있었고.. 주위 친구들도 워낙 다양한 국적/인종들이라서 우리의 다름따위는 그다지 이슈될만한 것도 아니였으니까..
그 친구와 한국에 딱 한번 다녀왔었는데... 사실 그 때도 국제연애의 기분이라기 보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는 영국인 친구를, 역시 외국인이라고는 내 일본인 친구를 2일동안 본 게 전부인 내 가족들에게 소개시켜주고, 그 외국인 손님을 우리집에 재워야 한다는 부담감때문에 여행가이드로서의 스트레스가 더 컸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국제연애'를 하고 있고, 그 다름에 대해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건, 사실 한국사람들을 포함한 몇몇 동양인들을 만났을 때다. 우리가 거리를 걷고 있으면, 그들은 우리를, 아니 정확히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고, 어떤 동양인 여자들은 내게 다가와, 서양인 남자친구를 만나니까 어때? 하는 질문을 대놓고 하기도 했고, 자기도 '외국인 남자친구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분들도 있었고, 어떤 남자분들은 아예 나와 말도 하지 안으려 하거나, 어떤 분들은 '한국 돌아가면, 외국인 남자 만난 적 없었다고 하면 되죠'라는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을 건네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내 첫 국제연애가 실패로 끝나고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을 때, 어떤 친구는 정말 대놓고 내게, 넌 백인 좋아하잖아, 하기도 했다;; (물론 난 그 말에, '아닌데? 난 잘생긴 사람 좋아하는건데?' 하고 대꾸해줬지만 ㅎㅎ;;)
어쨌건, 지금은 어쩌다보니 국제연애를 했고, 국제결혼을 했고, 외국에서 살고 있다보니, 이런저런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의 이야기도 많이 듣게 된다. 도대체 이 외국인 남자/여자가 나를 좋아하고 있는게 맞는건지 알쏭달쏭해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이 남자/여자가 나를 진짜로 좋아하기는 하는건지, 아니면 그냥 즐기는 사이로 보는건지 그래서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정말 이 남자/여자를 잡고 싶은데 도저히 현실가망성이 보이지 않아 갈등하는 분들도 계시고, 이미 관계도 시작되었고, 진지한 사이도 되었는데 본인맘이 그게 아닌건 같아 혼자 괴로워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 당연히 기쁨, 고통, 즐거움, 괴로움이 수반되는거겠지만.... 그래도 굳이 국제연애를 하시는 분들에게 딱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국제연애도 똑같은 사람만나 하는 연애란거다. 때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지구 반바퀴를 돌아 만났는데, 이건 운명일 수밖에 없어'하고 뭔가 아닌 걸 알면서도, 그 끈을 어떻게든 이으시려고 노력하시기도 하는데.... 한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지만, '국적'의 다름이 그 운명과 기적성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그러니 상대가 누구이든 진심으로 끌리신다면 고백하시고, 그러다 사귀게 되시면 열심히 사랑하시고, 그게 아니다 싶을 땐 그냥 끊고 나오세요. 분명히 다른 국적의, 생김새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건 일종의 이탈 처럼 스릴있고, 생소하고, 색다른 경험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게 유지되리란 보장도 없고, 내게 딱맞는 반쪽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살다보면 다~~` 똑같아요~
........
김치에서 시작된 얘기가 멀리 가다못해 산으로 가네요;;; 벌써 12월이네요. 한국도 많이 추운가요? 전 방학만 기다리고 있답니다 ㅎㅎㅎㅎ;; 김장도 했고, 요즘엔 날이 추워서 그런지 따뜻한 국물도 생각나고, 칼칼한 것들도 생각나고... 붕어빵도 먹고 싶고... 왠지 모르게 따뜻한 자판기 커피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온갖 장식과 캐롤들로 들썩거릴 한국거리가 생각나요. 요즘 뉴스를 보니, 크리스마스 장식보다 사람들의 촛불로 거리가 더 밝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모두들 응원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baby-free 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대학) 같이 일하기 싫은 타입들 (0) | 2017.06.12 |
---|---|
관광객과 현지인의 입장 차이 (0) | 2017.04.23 |
영국대학) 돈을 낸다고 다가 아니다 (0) | 2016.11.25 |
영국에 이어 미국까지, 참 가지가지한다 (0) | 2016.11.10 |
그래,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 (0) | 2016.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