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제대로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두가지 소식을 들었다.
시할아버지께서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것과, 이대로라면 도날드 트럼프가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출근길에 라디오를 통해 그의 당선연설을 들었다...
새삼 2016년이 꽤나 길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 초에는 시할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이번에 시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6월에는 영국이 Referendum을 두고 그 난리를 쳐대다가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쪽으로 투표하더니, 설마 미국까지 그러겠어, 하는 생각을 비웃으며 그가 당당히 미국의 15번째 대통령이 되어버렸다. 허허....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그래도 브렉시트를 한번 겪어봤다고 도날드 트럼프의 당선소식이 그렇게 충격적이게는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뭐랄까, 세상이 변하려고 작정했구나, 하는 걸 이제는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 한구석에서 찜찜하니 못마땅한 감정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걸 발견한다.
올해 들어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캠페인을 보면서 든 생각은 뒤틀린 놀부심보 같다는 거다. 그동안 같은 형제이건 말건 자기 좋을대로 다하면서 누릴거 다 누리고, 침략이고 약탈이고 뭐든 해가면서 마치 지구상의 우월한 인종인냥 굴어대던 백인들이, 다른 나라들이, 인종들이 이제야 좀 제 살길 찾아가고 자기들과 비슷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걸 보기 싫어 난리 치는 집단 반발같은 느낌.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60%가 넘는 백인 워킹클래스 집단이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래, 화가 났겠지. 예전에는 자기들이 나라의 주인공이였고, 흑인이나 남미인들은 모두 자기 종이나 되는 듯 부려댔는데 이젠 그게 아니니까. 그 꼴을 보기 싫었겠지.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자니 이제는 인종차별자 취급을 받고, 그러니 이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거야. 너희들 때문에 내가 직장을 잃었다고, 너희들 때문에 내 자식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혜택도 받지 못하고, 내 부모들이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다고... 다들 국제화, 국제화, 하는데 난 내가 자란 이 동네밖에 모르고, 사실 다른 나라에서 누가 어떻게 살든 관심도 없어. 그렇지만, 내가 사는 동네에 낯선 이민족이 들어와서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는 건 싫어. 누가봐도 다르잖아?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어? 소문을 듣자하니 남미인들은 다 도둑놈이라던데.. 어쩌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했지? 이제는 저 이민자들한테 대놓고 뭐라 말도 못해. 억울해 못살겠네. 내 땅인데 왜 저넘들이 와서 사냔 말이지! ...... .....
그래. 일단 자기들 나라니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한들, 그래, 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군,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래도 괘씸하단 말이다. 자기들 땅에 이민자들이 와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건 아니꼽지만, 그동안 자기들이 남의 나라 가서 마치 그 땅의 주인인냥 굴어댔던 건 괜찮았겠지? 영국과 미국, 그들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그들이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적은 아주 극히 드문데, 마치 자기들이 대단한 침략의 피해자라도 된냥, "We will take our control/country back!"하고 외쳐대는 걸 보면 그저 황당하고 어이없어 웃음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그들은 그걸 모르나 보다. 설마 그렇겠어, 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올해의 두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실제로 드러났을 때, 그래서 사실 충격이였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가 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때문에.....
어쨌건 이미 물은 엎어졌고, 세상은 변화를 향해 아주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듯 하다. 그동안 세상이 너무도 조용했는지, 국제화, 화합, 평화의 힘이 너무나도 거대해, 숨겨져 있던 반대의 힘들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오고 있는건지...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아이들이 자랐을 때, 언젠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배우게 되는 날이 올 때, 혹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올 때, 그 아이들은 내게 묻겠지.
왜 그런 일이 생겼냐고, 그 때 엄마/아빠는 뭘 했냐고. 내가 영국 혹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이들은 엄마/아빠는 그래서 그 때 어떤 선택을 했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그런 순간이 올 때, 내가 아이들에게 대답을 할 때 드는 감정이 죄책감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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