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민토리_blog 2015. 5. 3. 20:51

가끔은 머리속에서 글자들이 뒤엉켜 날뛰고 있을 때가 있다. 뭔가 형태를 드러내려 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이 뭔지도 모르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직소퍼즐의 조각들을 들고 있는 것처럼. 그럴 때는 그냥 하나하나 되는데로 잡아다가 나열해 둘 수 밖에 없다. 그러는 순간 나름의 어떤 개연성이 나타가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세비야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보면서 시작되였다. 저번주와 이번주에 걸쳐 아주 즉흥적으로 스페인 세비야에 다녀왔는데,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이라고 해서 길거리 어디에서나 플라멩코 공연에 대한 안내를 볼 수 있었다. '그런 건 관광객이나 보는거지'하는 남편의 핑계에도 불구하고, (그러고 보니 내가 거기 사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스페인 사람도 아닌데, 내가 관광객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구비구비한 오래된 작은 골목들을 지나다가 무심결에 보게된 작은 플라멩코 공연장이 인상적이라서.. 그날 저녁에 남편을 졸라 나와서 보게 되었다. La Casa de la guitarra 라고 하는, 오래된 작은 공연장에서 펼쳐진 공연이였는데, 대략 7-80명정도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였고, 그 앞에 작은 무대공간이 있었다. 뭐랄까.. 플라멩코라고 하면 스페인 길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조잡하고 화려한 기념품 가게의 드레스같은 것만 상상했던지라.. 사실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플라멩코를 탱고와 예전에 길거리에서 본 집시 무리들의 춤의 중간 어딘가로 상상했던 지라 그냥 사소한 정도의 호기심만 가지고 자리에 앉아 기다렸었다. 


그런데 막상 보게 된 플라멩코 공연은 기타 연주 두 곡, 춤이 곁들여진 공연 둘, 노래 둘, 마지막에 셋이 어울어지는 공연 둘로 구성되었는데... 처음 기타 연주부터 빠져들었다. 뭐랄까.. 공연 중에 간단히 소개를 해준 사람의 말처럼, 플라멩코는 보여주기 위한 어떤 화려한 공연이라기 보다, 아주 감정적이였고 표현하는 예술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굳이 한국의 문화 중 비슷한 걸 찾자면, 판소리.. 같은 거라고 할까. 사람 내부에 있는 어떤 감정이 차이고 차여서 그걸 기타라는 악기나, 춤이나, 노래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 그래서 공연은 흥겹고 정열적인 '오레!'하는 분위기라기 보다, 격정적이고 감정을 토해내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주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리고 공연자들의 특색도 다르겠지. 그 날 공연이 가장 authentic - 원조에 가까운 - 거였다니까, 다른 버전을 봤다면, 아니, 음식점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며 플라멩코 공연을 봤다면 또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공연 전에 줄을 서다가 밖에서 본 Bocadilla (스페인식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남자가 알고보니 기타리스트였는데.. 그의 아주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본 후에 그의 기타 연주를 들어서 그런지... 기타 연주를 듣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나름으로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아주 뜬금없다.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를 보면서. 분명 플라멩코의 고장으로 이름난 이 유명한 도시에서 플라멩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테고, 그 중에 이렇게 정기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게 쉽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중에 공연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수는 더 적겠지.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부분 플라멩코가 뭔지도 모르는 낯선 외국인들 앞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고, 하루 저녁의 박수를 받으며 나름 뿌듯함을 느낄 지도 모르고, 오늘은 다른 때보다 괜찮은 공연이였다는 생각에 보다 상쾌한 기분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가락에 스트레스 받으며 어떻게든 공연을 마치는 것에만 열중할 수도 있다. 그의 낮은 어쩌면 지루한 오피스와 종이들로 채워져 있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른 음식점에서 또 관광객들을 접대하며 음식을 나르거나, 몸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손만은 보호하려고 애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이 다가오면 그는 연주자가 된다. 기타를 들고, 그가 연주하는 곡에 감정을 쏟아부으(려고 노력하)면서... 그러니까, 누군가 그를 최고의 연주자라고 알아주지 않아도, 거대하고 멋지게 장식된 무대에서 잘 차려입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화려한 조명과 갈채를 받으면 연주하지 못하더라도, 분명 그에게는 연주한다는 행위자체가, 기타의 존재자체가 그에게 어떤 삶이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줄 수 있는 거다. 


이런 생각들이 지금도 내 머리속에 박혀서 웅웅거리며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내 개인적인 문제와 연결이 되있기 때문인데.. 4월에 영국에서 있었던 어떤 그림그리기 공모전에서 winner는 아니지만, 내 그림이 선택되어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주위에서는 'Congratulations, well done, you must be pleased'등등의 소리를 하며 축하를 해주고 있는데, 내 마음은 뭐랄까.. 좀더 복잡한 감정이 드는거다. 


그건 칭찬이라던가 인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관련이 있는건데.. 난 굳이 말하자면 부모의 관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기 때문에, 내 형제들이나 또래의 아이들이 누렸던 어떤 사적인 배움의 기회 (유치원이나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등등)을 가지지 못했고, 내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서 발휘된 어떤 성과 (좋은 성적이라든지, 백일장이나 사생대회에서 상을 타온다던지)들도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제대로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보통 좀더 관심을 받고 주목을 끌기 위해 말썽을 피우거나, 아니면 더 노력해서 칭찬을 받으려는 타입으로 나뉜다면, 나같은 경우는 후자에 가까웠다. 


물론 그런 내 노력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주긴 하지만, 뭐랄까.. 어찌할 수 없이 결핍된 건, 그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랄까.. 내가 한 성취에 대해 스스로 100% 확신을 할 수 없는 거다. 끊임없이 '내가 잘하고 있는걸까, 난 최선을 다했지만 어쩌면 내 최선이라는 것도 남들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걸 수도 있어, 내가 잘하는게 뭐지, 난 왜 좀 더 잘나지 못한걸까'하는 의심의 목소리가 시도때도 없이 새어나온다. 


십대가 되기 전까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다, 라고 고백하는 어떤 이들의 얘기를 듣자면 문득 부러워지기도 하는게 그런 순간이다. 스스로에 대한 어떤 확신. 그것이 우물안 개구리의 자만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어떤 견고함.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바탕. 그런게 있었더라면, 굳이 외부에서 인정하는 어떤 결과물을 내지 않더라도 어쩌면 '내가 이걸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그림 공모전에서의 이 결과에 대해.. 주위사람들이 축하해주고 내가 이루어낸 것에 대해 칭찬해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이게 정말 사실일까, 이번만 운이 좋았던 거고 내 다음의 그림에서 사람들이 실망하면 어떻게 하지, 이 그림이 정말 괜찮은 그림인걸까, 아니면 어쩌다 걸리게 된건 아닐까', 하는 수많은 자기의심의 목소리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지금의 나를 보자면... 더이상 이대로 내버려둬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는 불안과 의심의 목소리를, 좀더 많은 확신과 스스로에 대한 도닥임으로 채워넣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누가 인정하든 안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 삶에 의미를 던져줬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미 주어진 인생을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이제 그만 과거는 포기하고 좀더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현재를 과거로 바꾸는 게 낫지 않는가. 


물론 생각이 쉽다. 매번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목소리들을 덮어버리는 건 꽤나 힘들다. 그래도 해야겠지. 


...

덧. 

부모된 입장으로 생각하자면, 정말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고, 사랑을 주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강한 자아를 새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만큼 커다한 선물을 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나만 봐도 벌써 그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들이 몇십년을 괴롭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