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각인효과? 내 생각은 원래 내 생각이 아닐지도

민토리_blog 2015. 6. 2. 05:37

이번에 영국에서의 총선거가 끝나고 내 주위는 약간 시끌시끌 했었다. 막상막하일거라고 예상했던 보수당 (The Conservative Party)과 노동당 (The Labour Party)의 승부랄 것도 없는 승부가 한쪽의 완전한 우세로 끝나버리자, 원래 주위에 그렇게 대놓고 정치성향을 얘기하지 않던 몇몇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거다. 대부분 Anti-Tory (보수당 반대)의 목소리였는데, 거기에 아주 솔직하고 가끔 아주 예민한 문제도 그냥 슥슥 썰어다가 내밀기를 좋아하는 영국인 친구 하나가 페이스북에 대놓고, "주위에 보수당의 재집권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그럼 과반수를 넘긴 보수당 집권파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거냐?"하고 질문을 던진거다. 그러자, 처음에는 예의바른 영국인들답게, 가볍게 "나도 그 생각했어", "난 아닌데?", 그런 식으로 가볍게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슬슬 내용물이 늘어나더니, "보수당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좀 있거나, 원래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놓고 자기 성치 성향을 SNS에 올리겠냐", 그러다가, 급기야 "그들은 돈이나 자신들의 이익밖에 보지 않는 물질주의자/속물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는거지" 하는 식의 댓글까지 달렸다. 

그러자 보다못했는지 보수당 찬성파들이 나서서 댓글을 달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자라온 환경도 있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 보수당을 지지하는 가족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수당의 정치이념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다", "이번 노동당의 선거공약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 그래도 노동당 지지 세력들이 밀고 나오자, 거기에 한 친구가, "The Labour party is largely supported by the working class, who may not even spell properly - 노동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철자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노동계층이 많다" 하는 아주 거대한 폭탄을 투척함에 따라, 제 3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아주 좋은 불구경이 되어버렸다 ㅎㅎㅎ ;;; (덤으로 이걸 보면서 영국이나 한국이나,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더 무례해질 수 있구나, 하는걸 깨달았다)


나와 남편은 정치에 관한 걸 자주 보고, 서로 거기에 대한 대화도 꽤 많이 하는 편이다. 가끔 한국이나 스페인에서의 정치 상황, 부패, 비리, 이런 케이스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그러지만, 많은 경우는 아무래도 공통의 이해영역이다 보니 영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얘기를 한다. 주위의 영국친구들도 챙겨보지 않던 총 선거 전에 있었던 각 정당 대표들의 토론쇼도 둘이 차와 케잌을 먹으면서 영화보는 마냥 같이 봤으니까 ㅎㅎ;;


그러다가 이번 선거를 두고 스스로도 좀 의외인 사실을 발견했는데... 나와 남편은 둘다 자기 나라의 정치 상황에 관한 것이라면 굳이 따지자면 중도좌파쯤이라고 할까, 어쨌건 이왕이면 여당보다는 야당을 지지하는 쪽에 가까운데, 이번 영국 총선거를 앞두고 둘다 가상의 상황에서 (둘다 영국 시민권자가 아니라서 총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만약 투표를 하면 어디에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가능하다면 Liberal Democratic (자유민주당), 아니라면 Conservative (보수당)에 투표했을 거라는 답을 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보수당과 노동당의 패가 갈린 논쟁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난 좀더 보수당 지지 여론에 가까운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얼마전에는 아주 공교롭게도 이틀동안 성향이 다른 두 그룹의 친구들과 만났었는데.. 육아, 교육 방침등으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레 이번에 끝난 선거와 관련된 정치쪽으로 흘러갔고, 첫번째 그룹의 친구들과는 꽤나 생각이 맞아서, "people on benefit"이라던가, 복지정책이 그동안 얼마나 낭비되었는지,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할 노력도 없는 이들의 생계마저 일하는 이들이 책임져야 하는가,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고.. 두번째 그룹의 친구들이 Tory government와 기득권자들이 얼마나 사회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에 대한 비판을 할 때, 난 반론을 하지도 않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했다. 첫번째 그룹의 친구가 말했던, "It is difficult to say openly that you are a Tory-supporter"를 새삼 생각하면서... 


그러고 나서 생각을 하니, 두 그룹에 속해있던 이들의 성향이나 출신 배경이 다른거다. 첫번째 그룹에는 독일인도 있고, 의사도 있고, 옥스포드 출신의 친구도 있다. 두번째 그룹은 대부분 로컬 출신이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on benefit인 이들도 있다. 그러니까..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 세력들의 축소판이였던 거다. 그리고 난 우습게도 첫번째 세력과 나를 좀더 동일시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을'이였던 적이 월등히 많았기 때문에, 기득권이나 경제적 갑들인 재벌이나 회사 측의 입장보다는 늘 피해를 받는 이들의 입장에 훨씬 눈이 가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가능한 그들과 함께 서려고 했었는데.. 우습게도 영국에서는 기득권의 생각에 좀더 근접해있다 - 왜? 갑자기 내가 무슨 로또를 맞아서 때나게 부자가 됬다거나, 영국의 기득권이라 불리는 백인 중상위층과 결혼을 한 것도 아닌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왠지 내게 '각인효과'라는게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Cambridge'라는 곳이 영국사회라거나 영국인들을 나름 깊이있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이들, 그들의 사고방식, 그들의 태도, 성향들, 그런 것들이 내게는 알게 모르게 'Proper Britishness'로 인식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물론 그곳을 벗어난 지금은 그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living in a bubble'같이 특수한 상황이였나 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6년이라는 나름 긴 세월동안 내게 깊숙히 스며든 그 영향을 무시할 순 없는거다. 그래서 마치 알에서 깨어나 개를 처음 본 병아리마냥, 이 영국사회에서 난 보수당의 지지 세력으로 뭉떵그려 스테레오타입 된 백인, 중상위층, Public school의 사고방식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쫑쫑거리며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건 아닌가.. 실제로는 UKIP의 몇몇 광적 추종자들이 소리치는 "우리 (백인) 영국인의 직업과 삶의 터전을 빼앗는, 그렇기때문에 당장 영국에서 쫒아내버려야 할 (유색) 이민자"에 좀더 가까우면서... 허허


이걸 계기로 요즘 머리에 잡다한 생각들이 많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사람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지만, 적어도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나름 나만의 주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타지에 나와 10년이 넘은 시간을 지나 살아오면서.. 나름 영국에 대해 왠만한 수준의 이해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편협한 생각이 아니였나.. 얼마전에 영국에서 알게된 한국분께서 주신 매실장아찌를 내 평생 처음 맛본 것처럼, 웨일즈에 이사와서야 웨일즈와 잉글랜드 사이의 빈부격차와 미묘한 정치적 갈등상황을 처음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모르는 것이 이렇게도 많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는데.. 내가 이정도면 충분히 알고 있다, 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것이 맞는 답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각인효과'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스며든 주위의 생각을 그대로 내뱉아내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하긴, 단 하나의 인격체로서 세상 모든 걸 이해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뭘 단정짓기전에 한번은 더 생각해볼 기회는 이번에 마련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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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거 외에 처음 접한 경험때문에 혹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건 없는가 생각해봤는데... 


하나. 처음 겪었던 부정적 경험때문에 Host Family라고 하면, 돈만 밝히고 외국학생들에게는 유통기한 지난 인스턴트 식품을 주면서, 자기들끼리는 근사한 저녁을 차려먹는 올리버트위스터에 나올법한 주인집 가족들을 생각한다. 


둘. 이름에 관련된건데.. 역시 처음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그다지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Emma, Zemma라는 이름을 들으면, 새침떼기이면서 싸가지 없을 거란 짐작을 한다;; 비슷하게 Rachel이란 이름을 들으면, 무례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들던 금발의 영국여자가 생각난다. 그리고 Toby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수염이 나있고 머리가 곱슬하고 안경을 낀 강한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구사할거라는 짐작을 한다. Jack이라는 이름을 들으면왠지 얍삽할 것 같고 -_-;;;;; 


셋. 누구든 말의 끝마디에 "Do you understand?"하고 확인의 말을 붙이면, 바로 기분이 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방어막이 올라간다;;; 반면에, "Are you alright/ Is it OK with you?" 하는 말을 들으면 호감도가 살짝 올라간다. 

넷. 문신이 많고, 머리색이 이상하고 (밝은 분홍색이라던가, 보기만 해도 제대로된 염색이 아니라는 느낌이 팍 오는 그런 염색), 화장이 진하고, 담배를 피는 사람이 내게 말을 걸면 나도 모르게 일단 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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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도 타지생활 하면서 그런 거 있나요? 처음 경험때문에 그걸 진리인냥 믿고 있었던, 혹은 믿고 있는 그런 경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