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는 꽤나 다양한 티비 프로그램들이 존재한다. 예능이라 부르는 것들 중에도 Big Brother 같이 사람들을 어떤 특수한 상황에 몰아넣고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게 있는가 하면, 몸이든 외모든 먹는 습관이든 뭐든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치료를 명목으로 보여주는 것도 있고, 어떤 특정한 분류의 사람들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거나, 집시라거나)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데이트 하는 것도 있고, 하여간 가지가지 많다. 그 중 영국에서 또 많이 볼 수 있는 티비 프로들은 집과 관련되거나 요리와 관련된 것들이다. 하여간 영국인들은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 요리는 왠지 대리만족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토록 많은 요리 관련된 프로들이 있는데도 왜 일반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나, 존재하는 음식점의 수준은 그 모양인가!)
이런 현대적인 개념의 예능이나 코메디, 드라마, 뉴스 등을 제외하고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영국에는 유독스럽게 과거나 역사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많다. 특히 BBC Three 나 BBC Four 같은 걸 보면, 툭하면 영국의 기차 역사, 산업혁명, Victorian era, Georgian era, 티비 역사, 건물 역사, 왕실 역사, 전쟁 관련 다큐 등등 뭐가 많다. 물론 세계의 유적, 유물, 역사 등에 관한 것도 있지만, 영국과 관련된건 꼭 하루에 하나 이상 볼 수 있다. 나처럼 외국인의 입장에서 영국의 사회나 역사를 이해하는데 그만한 프로그램도 없고, 그래서 즐겨 보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건, '이거 전에도 본 거 같은데. 참 많이 보여주네'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 영화 한 편을 보고, '그래, 그래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써보는 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 해독을 위해 투입된 천재 수학자 Alan Turing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화 한건데... 참... 간간히 런던 공습의 모습이나 전쟁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일을 하고 있는 정부기관의 모습은.. 오래된 품격있는 건물에 모두 풀 셋의 정장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작은 모자를 머리에 쓴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절대 뛰지도 않고 허리를 곧게 세운 모습으로 걸어다니고, 하루의 일이 끝나고 나면 펍에 가서 파인트를 마시고, 담배를 피고, 가끔 춤도 추는... 참......... 우아하고 'Proper'하다.
그 장면들을 보면서 어떤 이질감을 느꼈는데... 한국에서 전쟁과 관련된 영화들 중에 군복을 입고 있던 그것도 외국인인 군인들 외에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있던 이들이 나왔던 영화가 있었던가. 굶주리고 헐벗고, 땅을 파먹고, 감자 한 알에 싸우는 모습이나 봤지, 전쟁 중인데... 이렇게 한량하게 (!) 하루의 일(!) 후에 펍에 가서 파인트를 마시며 농담도 하고, 음악도 듣고,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눈빛도 주고받고... 정중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단 말인가...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아무리 독일군이 폭탄을 지맘대로 런던 곳곳에 때려 부었다 해도, 실제로 독일군이 들어와서 지상전이 벌어진 건 아니였으니까..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주인공인 Alan Turing이 펍에서 갑자기 영감을 받아서 암호 해독의 실마리를 찾아서 마침내 암호를 풀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래, 그 순간. 난, '아, 저래서 영국인들이 과거에 집착하는구나!!!'하고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전율 넘치던 순간. 영국을 전쟁의 승전국으로 만들 수 있게 해준 그 역사적인 순간. 그로인해 영국은 독일군을 물리치고 온 세계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세계대전을 끝나게 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우리는 구할 수 있었던건가.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건, 우리, 영국인의 힘이였다!! ............
그뿐인가, 산업혁명을 처음 일으켜서 세계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것도 영국이였고, 기차를 처음 도입시킨 것도, 티비가 처음 나온 곳도 다 영국이였다. 그리고 그 많은 수의 공학도를 비롯한 천재들... 이런 영국인들이 아니였다면, 이 세계가 지금의 수준으로 발전되기까지 몇십년의 지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
이런 생각들. 그 찬란하던 과거의 영광이 아무래도 자꾸만 영국인들로 하여금 향수에 젖게 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거다. 솔직히 지금의 영국은 과거의 영광과는 거리가 좀 있지 않은가. 한때는 세상을 호령하던 '대영제국'이였지만, 미국에 밀려서, 지금은 중국에 밀려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나라라고 불리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는가 말이다. 심지어 유럽연합에서도 프랑스, 독일에 밀려서, 요즘에는 탈퇴니 뭐니 하면서 까탈을 부리고 있는 거 같던데;;;;
한때 잘나가던 사람들이 툭하면 '내가 왕년에 말야...'하는 것처럼.. 혹시 영국은 그러고 있는건 아닌지... 살짝 생각해본다. 허허
...............
영국은 그렇다치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은 좀 반대로 역사에 관한 프로그램이 별로 없는데... 있다해도 참 오래된 삼국시대, 고려, 조선시대에 관한거... 일제시대가 배경이 된 드라마 같은 게 있지만, 다큐는 별로 없고... 그나마 가장 최근의 다큐라고 하면 한국전쟁 정도일까... 특히 한국 근대 - 독재시절 등에 관한 꽤 심도있고 믿을 수 있는 다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정도니까 (혹시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리고 일제시대부터 해서 근대에 관련된 것들을 보면... 참... 어둡고 암담하기 그지 없다.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고.. 보고나면 우울하고, 슬프고, 가슴아프다. 이러니... 누가 과거와 관련된 걸 그리 보고 싶어하겠는가;; 현재를 보더라도, 그렇게까지 환골탈퇴해서 해피엔딩을 맞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_- 아니, 도리어 현재에도 과거의 그림자가 깊숙이 드리워서.. 아무리 닦아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검댕이가 묻어있는 멋진 하얀 정장을 입고 있는 기분인데...
그래서.. 이럴 때는... 살짝 영국이 부러워진다. '내가 한때는!!'하고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왕년'이라도 존재하니까.. (우리는 뒤지고 뒤져서 그냐마 '고구려'라는 위안을 찾아내긴 했지만...;;) 너희, 좋겠다.
과거는 그렇다치고... 한국에 좀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길 바란다. 그래서 나중에 그런 고통스런 과거의 모습들도 '인생역전'의 경험담처럼 솔직히 보여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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