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 처음 쓰는 글인데 오늘은 일단 좀 아주 사적인 푸념(!)을 해보고자 한다 (하긴 새해라고 해봤자 똑같이 하루가 지나는 것일뿐, 짠하고 모든게 리셋되는 건 아니니까...)
새해를 앞두고 2-3일 전부터 몸이 좀 별로 였다. 속이 안좋았고 목이 계속 아파왔고 머리도 자꾸 아팠다 말았다 했으니... 그러다가 31일 오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무슨 어린이들 엑스포 같은 곳이 있다길래 데리고 갔다가 또 공원에서 놀겠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가 내리 쬐는 스페인의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데도 자꾸 몸이 추워지는 거다. 남편이 걱정이 되었는지 (난 한번 아프면 끝장을 보게 골골 걸리니까 ㅎㅎㅎ;;) 문을 연 약국을 검색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약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비실거리며 침실로 올라가 뻗었는데... 그래도 연말이니 아이들 자기 전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아 저녁에 다시 내려왔다. 아이들을 재우려는데 첫째가 갑자기 무섭다며 울먹거렸고, 둘째는 그런 첫째에게 질세라 자기도 무섭다며 난리를 치고, 내가 없는 사이 아이들과 씨름하다 자기 부모와도 다툰 남편의 인내심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그 중간에서 어떻게든 중재를 하려는 나도 내 몸 아픔과 더불어 지치고 있었다. 어찌어찌 아이들을 달래고 내려오니, 원래는 연말 마지막에 가족끼리 저녁을 먹는게 스페인 문환데 아무 준비가 없어 물으니 나도 몸이 안좋아 안내려오니 그냥 알아서들 챙겨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주방을 가보니 정말 먹을게 없는거다;; 집안에 흔하게 넘쳐나는 jamón serrano라고 부르는 햄 종류, chorizo라는 약간 매운 햄/소세지 종류, 다양한 치즈, 올리브 이런건 늘 그렇듯 있는데, 빵도 다 먹었는지 없고.. 당연히 요리된 것들은 없고.. 입맛은 없는데 약을 먹을려니 속이 비면 안될 것 같아 크래커에 치즈 몇개를 먹고 약을 먹었다. 시간은 벌써 10시가 넘었고, 맘 같아서는 당장 이라도 올라가 그냥 누워 자고 싶었지만 연말인데 그래선 안될 것같아 거실 소파 한쪽에 누웠다. 장작이 잘 타고 있는 벽난로 앞인데도 몸은 추웠고, 담요로 덮어도 추웠다. 시부머님과 남편은 다들 의자/소파 하나씩에 몸을 맡긴채 연말 방송이 나오는 티비를 보고 있었고, 알아듣지 못할 스페인어를 듣고 있다가 계속 잠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
자다가 또 추워져서 눈을 뜨니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나와 벽난로 사이에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아계셨다. 나도 추운데... 그리고 그렇게 계시면 나도 티비고 뭐고 안보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너무 몸이 힘들어 자정까지만 참자, 했다. 그렇게 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거 같은데 남편과 눈이 마주 쳤다. 남편은 손에 포도가 든 와인잔을 내게 보여주며 눈짓으로 내 옆을 가리켰다. 보니 내 옆에도 와인잔이 놓여져있었고 시간을 보니 벌써 2분 전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일어나 스페인에서 새해를 맞으며 가장 괴로운 포도 열 두 알 삼키기를 시작했다. 진짜 먹으면서 울고 싶을 정도로 ㅠ ㅠ 그러고 나니 시부모님이 샴페인을 가져다 주셨는데.. 진짜 한약 먹듯 한모금 마신 후 이제야 내 할 일을 다했다, 하는 마음으로 침실로 올라가 뻗어 버렸다 ㅠ
그리고 새해 첫날. 여전히 몸은 너무 아팠고 무엇보다 속이 쓰려서 뭐든 먹고 약을 먹어야 겠다는 일념으로 내려갔는데.. 1층 아이들 놀이방에서 아이들과 있다가 완전히 지친 모습의 남편이 내 등장에 반색을 하다가 내 몰골에 내가 완쾌된게 아니란 걸 알고 실망 반 걱정 반 된 표정을 지었다. 시부모님은 산책을 가셨다길래 그럼 아이들도 데리고 가시지, 했더니 남편이 할말 많은 표정으로 눈을 돌리더니, "tell me about it"했다.
남편은 그럼 나 아침 먹을 동안 씻고 오겠다며 올라갔고 난 시리얼을 먹고 있는데 아이들은 와서 북적북적 거리고 다시 머리가 울리기 시작해 약을 먹고 좀 거실에 읹아있을까 했는데 시부모님이 돌어오셨다. 들어오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형님네 가족이 이제 곧 올거라고... 머리가 좀 멍해젔다. 그래, 신년 인사 오시는 거겠지, 근데 지금??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아이들에게 얼른 옷을 갈아입으라고 올려보내고 난 아이들 놀이방 정리를 하고 있는데 밖에 차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 형님네인가 싶어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완전 꼴도 말이 아닌데.. 그래서 후다닥 침실로 올라갔는데 남편은 아직 씻는 중이다. 그래서 대충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도 몸도 땅에 질질 끌릴 듯 무거웠다. 그렇게 애써 사교적인 가면을 찾아 쓰고 머리 속에 남아있는 모든 언어와 관련된 세포를 쥐어짜서 스페인어로 대화를 하고.. 그러다 목이 탈 것같은 기분이 되었을 때, 이제 할 만큼 했다는 기분으로 인사를 하고 침실로 올라간 뒤 뻗어버렸다.
그렇게 비몽사몽으로 해매고 있는데 남편이 올라와 점심은 안먹느냐고 물었다. 스페인에서는 새해 첫날 점심도 의미가 큰 거라서.. (한국 떡국 먹는거 마냥... 그렇다고 정해진 메뉴가 있는건 아니지만.. ) 또 비실거리며 내려가 앉았는데.. 아직 starter (전채 요리) 단계였다. 아무것도 내키지 않아 그냥 앉아 있는데 시부모님은 와인 줄까, Chorizo (매운 햄) 줄까 권하신다.. 입맛이 없어 사양하고 메인 요리로 나온 arroz al horno (다양한 고기, chickpeas, 토마토, 감자, 마늘을 넣고 오븐에서 익힌 쌀요리)를 주시며 마늘도 듬뿍 주시려 했다. 그러니까 보통 때라면 당연히 Chorizo 든 마늘이든 다 좋아하고 잘 먹는건 사실인데... 목이 아파 뭘 삼킬 수도 없는데 자꾸 그런 걸 권하시니, 아니 도대체 이분들은 내가 아프다는 걸 알긴 하나, 그런 생각 까지 드는거다;; (물론 내가 너무 축 쳐져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거라도 많이 먹어라 그런 배려였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또 몇 숟가락 먹고 약을 먹고 올라와 뻗었는데...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셔서 우리 산책 갈건데 뭐 필요한거 없냐, 하고 물으셨다. 자다 깬 머리에 자동반사처럼 "No gracias" 만 반복하다가 시어머니가 가신 뒤 다시 머리가 아파와 누워 있는데, 이번에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안그래도 속이 쓰린참에 뭐라도 먹자는 생각에 또 내려갔는데.. 여전히 먹을 건 없고.. 아이들은 놀다 들어와서는 아빠가 뭘 해주지 않는다며 날 잡고 늘어졌다. 머리는 울리고, 속은 쓰리고.. 아이들은 계속 날 잡고 올라타고, 주방에서 내가 어떻게든 먹고 낫자, 라는 기분으로 또 시리얼을 먹으며 이 난리통을 겪고 있는 동안, 남편과 시부모님은 거실에 나가 있고.. 머리가 울리고 못견딜 거 같아 "enough!!" 하고 소리치곤 그대로 침실로 올라와 버렸다.
올라왔는데 서러웠다. 몸이 아픈 것도, 밥 하나 없어 시리얼 따위나 먹고 있는 이 상황도, 제대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갈등도.. 억지로 꾸역꾸역 가족의 의무를 다하려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우겨넣고, 그래놓고 이해 받지 못해 지쳐버리는 나 자신도..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집이 어딘지 몰라도 그냥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게 맘 편한 곳으로...
그렇게 괴로운 상태로 새해 첫날을 보내고 있다. 내일부터 또 고모님 댁이 갈 일이라든지, 남편 친구들 집 초대라든지 해서 영국에 돌아가기 까지 해야 할 일정들이 많은데.. 지금은 그냥 좀 다 때려치우고 싶다;; 물론 이러다 영국에 도착하면 바로 월요일부터 출근이긴 하지만... 도대체 휴가가 휴가처럼 느껴지는 건 언제쯤에나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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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새해 답지 않게 우울하긴 했어도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기분좋게, 나른하게, 혹은 신나게 연말을 보내시고 새해를 맞이하셨길 바랍니다 ^^
또 한 해 열심히 살아갈 힘이 주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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