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더니, 큰 아이 첫마디가 "내일 학교에 돈 가지고 가야돼!"...
무슨 돈이냐고 물으니, 학교에서 Royal Wedding 기념으로 Fundraising event를 하는데, 어느 반이 돈을 더 많이 모으는지 경쟁한다고... 그런데 자기는 아직까지 학교에 돈을 가지고 간 적이 없으니 빨리 가지고 오랬다며 난리다. 아. 그 돈 모은다고 기부하라며 보내온 종이 쪼가리.. 내가 재활용 상자에 넣고 내다버린 그 종이 쪼가리. '자발적 -voluntary'라고 할 땐 언제고 이런 식으로 애들을 들들 볶아 내보내다니.. 거기다 무슨 반 대항까지 한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알았다, 하고 큰 애를 달래고, 오늘 아침.
눈을 뜨자 마자 영국 국기처럼 빨강, 파랑, 흰 색으로 된 옷을 입고 가야 된다고 난리를 치더니, 유치원에 가기 전에 또 돈을 내놓으란다;; 그래서 기부 종이 이런 것도 없고 그냥 종이에다가 이름을 써서, 5파운드를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그걸 큰 애가 보더니 시무룩해지며서, '가장 큰 돈 - biggest money'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 반이 이길 수 있다고 선생님이 그랬다고 또 뭐라 하는거다. 그걸 듣고 있는데,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담임 선생님과 면담할 때 말했더니, 아니라고, 자기들은 절대 '강제'라고 한 적 없다고, 그런 건 '자발적'이고, 그 결과에 대해 아이에게 어떠한 문제도 가지 않을거라고 말했으면서.. 또 이런 식이라니. 그 때도 아이는 자기 반에서 돈을 가지고 오지 않은 아이는 나 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우리반이 일등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울었고, 이번에도 혹시라도 우리가 돈을 주지 않는다고 할까봐 어제 오후부터 그 난리를 부려댔다. 그리고 돈 개념도 제대로 없으면서, 5파운드가 왜 작다고 생각한 건지, 큰 돈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고...
남편과 나는 그 꼴을 보다가 둘다 열이 받아서,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겠다고 (formal complaint) 아이들 뒤에서 으르렁 거리며 일단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냈다. 그런데 뒤돌아 생각하니 뭔가가 찝찝하다.
사실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모금행사를 진행하는 건 학교가 아니라, PTA (Parents and Teachers Association)라고, 학부모회에 가까운 모임이다. 학부모회에서 주기적으로 이런 행사를 열면서 가정통신문을 보내서 아이들을 통해 돈을 모으는 방식인데.. 그러다 보니, 학교에다가 그 방식에 대해 불만이 있다고 말하면, 그건 '학교'가 아닌 '학부모회' 소관이다, 라고 발을 빼고, 그렇다고 '학부모회'에다가 뭐라고 하자니 다른 학부모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 같아 아주 찜찜하고 내키지 않는다. 안그래도 요새 아이가 자꾸 반 애들이 안놀아준다고 집에 와서 뭐라고 하는 날들이 많은데... 내 아이의 같은 반 아이들 부모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면, 도대체 그 뒷감당은 누가 하나... 내 아이가 하겠지. 그 생각을 하니, 발이 묶인 듯 뭘 할 수가 없어진다.
남편은 바로 그게 싫은거라고, 내 아이를 볼모로 잡고 누가 돈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것 같아서 그 방식이 싫다고, 돈이 필요하면 차라리 얼마를 내놓으라고 하던가, 그것도 아니고, 조부모나 이웃집에 가서 돈을 모아 오라고 하는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 자선행사 하는 거면 그냥 기부를 하면 되지, 왜 애들 경쟁을 시키냐고.. 그래, 나도 동의한다. 다 동의하고, 그래서 이렇게 열도 받는건데... 실제로 내 아이가 볼모로 잡혀 있지 않은가. 그래서 뭘 못하겠다. 뒷감당이 내 몫이면 칼을 뽑아도 진작에 뽑았을 것을.. 내 아이때문에 못하고 조용히 돈을 줘서 보낸다. 혼자 속으로 열을 삭히면서...
영국에는 이런게 많다. 아주 뼛속까지 이런 모금행사에 길들여진 것 같다. 친한 다른 학부모인 영국인 친구들에게 아침에 열이 받아서, 단톡방에다가 '이런 행사 진짜 싫다'고 궁시렁 거려 놨더니, 다들 '나 어렸을 때도 그랬어. 그런데 어디 가서 돈 받아 올거 없이 그냥 내 이름 쓰고 돈만 주면 돼.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이러는 거다. 그래, 너흰 익숙하겠지. 그런데 난 안익숙해. 이런 영국 문화, 매번 겪어도 안 익숙해져. 전에 기부문화에 대해서 글도 적은 거 같은데... 그래서 왠만하면 잘 참여하지 않고, 특히 아이들 시켜서 돌아다니면서 돈 받게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편인데, 학부모가 되고 나니 하기 싫은데 해야 된다. 그래도 뻗대고 있으면, 내 아이가 힘들어 하는 걸 봐야 한다. 전에는 난데없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무슨 Cancer research 팔찌를 사야한다고 2파운드를 내놓으라길래 뭔 소리냐고. 그런 걸 왜 사냐고 돈을 안줬더니, 다음 날 와서 또 조르고, 그 다음 날에는 기어코 우는 거다. 자기 반 애들 다 있다고. 그런데 나만 없다고. 그래서 애들이 자기랑 안놀아준다고. 진짜 맘같아서는 그 망할 생각을 해낸 학부모와 그걸 묵인한 학교를 뒤집어 엎고 싶었지만, 또 차마 그러지 못하고 결국 다음날 돈을 줘서 보냈다. 그 팔찌는 바로 다음날 아이가 학교에서 잃어버리고 왔지만...
거기다가 보통은 유니폼인데, 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는 이미 달력이 나와 있어서 그걸 확인하고 맞춰서 옷을입혀 보내면 되는데... 때때로 이렇게 학부모회에서 주최하는 행사에는 또 뭔가 옷이 따로 있다. 그리고 그걸 다 체크하기도 힘들고.. 남편과 나 둘다 풀타임이라, 사립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등하교 시켜 주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날라오는 종이쪽지가 유치원을 거치면서 사라지기도 하고, 거기에 유치원에서 주는 무슨 행사 공고까지 겹치면 나중에는 오늘이 무슨 날이였는지도 잊어버리기 대수다 (부모의 못난 핑계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내일 있을 그 넘의 Royal Wedding 때문에 몇 주 전부터 완전 난리도 아닌데.. 어제는 둘째 아이도 울면서 집에 왔다. 들어보니, 학교에서 무슨 Royal Wedding Party를 했는데, 다들 드레스를 입고 왔는데, 자기만 유니폼이였다고.. 하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둘다 학교 공고를 페북까지 뒤져가며 확인해서 유치원에 보냈는데, 이번에는 유치원에서 파티를 한다고 바닥에 레드카펫을 깔아놓고 난리도 아니다... 학교에는 빨강, 파랑, 흰 색의 옷을 입고 오라고 해서 입혀 보냈는데, 학교를 안가는 유치원 아이들은 다들 드레스를 입고 와서 또 아이가 그 아이들을 부러운 듯 본다. 진짜 미치겠다.
그리고 Royal Wedding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아~~~주 맘에 안든다. 그 결혼 자체가 마음에 안드는게 아니라, 그걸 둘러싼 이 난리난 분위기가 맘에 안든다. 만 3살인 둘째 꼬맹이는 이미 프린스 해리와 결혼하는 메간의 풀네임까지 알고 있다 (나도 모르는데!). 그리고 벌써 며칠째 Prince, Princess에 대해 주구장장 떠들어 대고 있다. 잠자는 공주 이야기도 여자의 허가 없이 키스했다는 부분 때문에 아이들 양성 교육에 좋지 않다며, '헨젤과 그레텔'과 더불어 학교에서 읽지 못하게 금지시키자, 그런 말까지 나왔던 사회에서, 아주 대놓고 애들한테 공주, 왕자 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걸 기회로 영국이란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라도 고취시키고 싶은 건지, 아니면 여전히 왕건제도가 굳건하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건지, 모든 매체를 통틀어, 심지어 학교, 유치원들마저 성조기로 둘둘 감싸서 해리와 메건의 사진을 곳곳에 걸어놓으니, 그냥 '어, 그래'하고 넘어가려다가 안그래도 살짝 삐뚤린 마음에 불을 지펴진다. 최근에 들었던 라디오와 봤던 티비에서는 메건이 얼마나 왕실에 어울리는 마음과 모양새를 가진 사람인지 마구 칭찬하는 프로그램들을 하더니.. 딱 그거다.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나지 못한 여자가 귀한 태생의 왕자와 결혼하려면 최소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그 수많은 공주 이야기들에서 반복적으로 비판되어진 부분을 아주 현실화시켜서 대놓고 하고 있다. 그럼 그런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나신 분은 그 피가 우리와 다른가. 그래서 내 작은 꼬맹이가, "We can be a princess"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욕이 나온다. 양성교육 어쩌고 해대더니, 내 아이 머릿속에 이따위 생각이나 심어주다니, 열이 받아서...
하아.. 아침부터 너무 흥분했다. 이런 저런 일이 겹치는 바람에... 다시 학부모 일로 돌아가서.. 요즘은 정말 심각하게 생각을 한다. 다른 학부모들과 좀 어울릴려고 해야 하나.. 보니까 아이 학년에 백인이 아닌 아이가 내 아이를 통틀어 딱 세명 있던데... 일부러 다른 아이들과 많이 어울리라고 한 학년에 반이 세개가 있는 큰 학교를 보내놨는데.. 도리어 그래서 아이를 더 겉돌게 한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아이들을 등하교 시키는 게 아니다 보니, 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며 다른 부모를 만날 기회도 별로 없다. 사실 본다고 해서 당장 친해질 것도 아니긴 하지만..;; 아니면 그냥 아이가 알아서 견디길 지켜 볼 수밖에 없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다. 참.. 학부모 되기 힘들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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