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살아남기

잡다한 하루의 생각

민토리_blog 2018. 5. 2. 18:49

전 꽤나 뭘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요, 보통 제 직업이 영어로 뭘 읽고 써야 하는 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작 제 개인 시간에는 한국어로 쓰여진 것들을 읽는 걸 좋아합니다 - 뭐 그것도 시간 나름이긴 하지만요. 이미 여러번 말하긴 한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부터 만화보는 걸 좋아했고, 그래서 요즘은 웹툰이 짜투리 시간을 위해 많이 사용되고 있죠. '유미의 세포들'이란 웹툰을 다시 보고 있다가, 그런 에피소드를 읽었어요. 주인공 유미가 회사를 그만둔 뒤의 하루가 나와있죠. 아침에 일어나서 습작 소설을 2000자 쓰고, 점심을 먹고, 주말에는 글쓰기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 가서 읽고 싶었던 책을 읽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만 하다가 마무리 짓는 하루. 


그걸 보며 여러면으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첫째로, 전 경제적인 여건에 대해 상당히 민감한데, 그다지 풍족한 환경에서 크지 않았던 것도 있고, 오랜 생활 혼자 유학생활을 감당하면서 어떨 땐 진짜 먹을 것을 줄여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생활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어떤 공포감 같은게 있거든요. 매일 살아남아야 하는 생활이 지긋지긋 하기도 했고,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아무리 적금이 있다고 해도,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삶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꿈을 위해 경제적인 부분을 내려놓는 주인공의 선택이 놀랍고, 또 그 용기에 감탄했죠. 

그리고 두번째로, 아무런 safety net 없이 자기의 재능만 믿어야 하는 꿈을 향해 올인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어요. 전에 육아 때문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휴직을 선택하게 됬을 때, 그 때 남편이 그런 말을 했었죠. 지금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돈 걱정 안하고 하고 싶을 걸 해도 상관없다, 고. 그렇게 지원해주는 남편이 고맙긴 했지만, 첫번째 이유와 관련해서 무엇보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 때 몸은 힘든데 뇌가 아주 펑펑 놀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했지만.. 그걸로 진짜 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내가 만드어 낸 것이 어떤 결과를 내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결국은 '늘 하고 싶다'라고 말했던 걸 '취미'의 바구니 안에 넣어 놓고, 둘째의 두돌 전에 바로 직장 찾기에 돌입했죠;; 


다시 복직 하기 전에 제가 꿈 꿨던 이상적인 생활은 그런 거였죠. 낮동안에는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오면 하고 싶었던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옷도 만들고, 읽고 싶었던 책도 읽고, 피아노도 치고, 주말에는 정원도 가꾸고, 그렇게 직장을 통한 경제적, 정체성 안정과 취미 생활을 통한 내적 만족도 얻는 삶. 


그런데 제 일상은 그렇게 굴러가진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낼 준비를 하고 제 출근 준비를 하느라 바쁘거나, 아니면 7시도 되기 전에 출근해버리죠. 아침에 연구실에 도착하면,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거나, 메일에 대한 답장을 보내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연구 자료를 찾거나,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요. 물론 강의가 많은 첫 학기와 두번 째 학기는 그럴 틈도 없이 메일 좀 처리하고, 강의 준비하고, 강의 갔다가 왔다가 그러다가 하루가 가지만요. 그러는 동안 메일은 끊임없이 날라와요. 학생들로부터, 대학의 온갖 곳곳으로부터.. 메일을 쌓아두기 싫어서 당장 해결한 건 바로 바로 처리하지만, 그래도 안되는 건 빨간 깃발을 꽂아두죠. 따로 노트에 해야할 것 목록에 추가해 두기도 하고요. 그렇게 순식간에 하루가 가고, 저녁에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대충 먹이고, 씻기고, 그러고 나면 진이 빠져요. 학기 중에는 처리하지 못한 메일들이 매일 쌓이기 때문에, 연구와 관련된건 보통 저녁 때 시간을 이용해서 일을 하죠. 그러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운동을 하러 다녀오구요. 그렇게 매일 보내다가 주말이 오면 아이들과 뭘 할까 고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어딘가 다녀오면 주말이 지나갑니다. 그나마 주말 저녁에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남편과 같이 거실에서 영화를 보든가, 피아노를 치거나, 웹툰을 보거나, 그러구요. 


이번 마지막 학기는 강의는 없는데, 학기말 과제들이 우르르 쏟아져 오는데다가, 6월에 학생들 진학 심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 과제들 채점을 하죠. 대학은 7월 전에 내년 학기와 관련된 것도 대충 마무리 지어야 되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할 게 많아요. 그래서 요즘은 매일 대학에 나갈 필요는 없지만, 강의 준비나 강의 대신 채점을 하고, 메일을 처리하고, 다른 연구 관련된 마감을 확인하고., 준비하고 그렇게 또 같은 하루가 반복된답니다. 


오늘은 미팅이 여러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우르르 쏟아지는 비 속을 뚫고 아침 7시 반에 출근을 했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들고온 빵으로 아침을 떼우고, 과제 채점을 하고, course leader이기 때문에 밀려오는 내년 학기에 관한 문의사항들을 처리했어요. 그리고 신입생들 입학원서 검토 요청이 여러개 쌓여있다고 독촉하는 메일도 받았고, 이메일 박스 안에 표시 해두고 잊어버린 '해야할 목록'도 다시 생각났구요. 


비는 이제 그치고, 꾸리꾸리한 구름들 사이로 가끔씩 해가 비쳐 들어오네요. 저는 아마 오늘도 일을 마치고, 시간이 가능하다면 운동을 하러 가거나, 아니면 바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겠죠. 그리고 그렇게 또 하루를 마무리 지을 겁니다. 


영국에서의 하루는.. 제가 도시에 살지 않는 까닭에, 대중교통을 이용하지도 않는 까닭에, 제 하루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아주 극소화되어 있답니다. 요즘에는 저처럼 다들 채점 한다고 대학에 오지않고 자기들만의 공간에 틀어박혀서 메일로만 소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대학에 와도 사실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제한적이고, 수퍼마켓도 주말에 몰아서 가고, 운동하러 가도 혼자 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잘 대화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때로는 한국의 하루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특히 전 계속 한국에서 도시에 살다 왔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지도 모르죠. 그리고 여기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꽤나 북적거리던 곳이거나 운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거나 걷거나, 대중교통을 사용하면서 사람들과 컨텍도 좀 많았던 거 같은데... 요즘은 새삼 제 하루가 생소하게 느껴지네요. 최근에 한국에 다녀왔기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친구들과는 틈날 때나 주말 때 만나긴 하는데... 그래도 새삼 참 사람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주절주절 쓰고 있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한국어를 사람들이 어차피 모르니까, 대놓고 연구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도 하구요 ㅎㅎ;;;) 


여러분들 하루는 어떤가요. 그냥 궁금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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