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주말에는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밖에 놀러나가는데 (밤의 열기가 가까이 있는 스페인에서 안그럼 영국에서 그럴 기회따윈 없다!), 어제는 남편의 친구들과 만나 술을 (난 무알콜 맥주) 마셨다. 만나서 서로의 근황을 묻고, 그 중 한명이 새로 샀다는 차 얘길 하고, 이번에 새로 업데이트된 안드로이드 5 버전에 대해 욕도 같이 하고, 스코틀랜드와 바르셀로나의 민족주의 성향, 그들의 독립의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나중에는 스페인역사까지 얘기하며 실컷 떠들다가, 다들 잠들어 조용한 집으로 늦게 돌아와 살금살금 내 방에 들어와 누웠는데.... 왠지 무척 산뜻한 느낌이 드는 것이 뭔일인가 하고 생각해보니... 거의 처음으로 '아기'가 중심이 되지 않은 대화를 하고 온거다!!!!
영국에서는 물론이고, 여기서 만나게 되는 여자친구들도 대부분 아기가 있거나 임신을 한 상태라, 늘 대화 주제가 '임신, 육아' 등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어제는 정말 첫인사로 아기들은 잘있냐, 를 제외하곤 다 딴 얘기만 하다 온거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얼마나 그런 아기나 육아가 중심이 되지 않은, 그저 평범하고 시시하기도 할 수 있는 대화들에 목말아 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럴 수 있었던게 아마 다들 남자들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면서 문득 궁금해지는게... 내 20대를 함께 누리던 그 많던 이성친구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남자들이 득실거리던 공대를 다녔던 내 소원은 여자친구들과 어울려 쇼핑을 가거나 커피숍에 가보는 거였다. 사실 하려고 하면 못할 건 없었는데, 대학내에서 그만큼 친한 여자친구들도 없었고, 사실 무엇보다 내 가슴속 깊숙히 그런 일들을 귀찮아(!)했었다. 대학 이전의 친구들과 드물게 한번씩 같이 쇼핑을 갈 일이 있었는데, 어우... 진짜 피곤했다. 다들 취향이 다르다 보니 한 명이 A가게를 둘러보는 동안 같이 들어가 기다리다가, 옆의 B가게는 또 다른 한 명 취향이라 또 들어가보고.. 그렇다고 빨리 고르는 것도 아니고, 진짜 뭘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진짜 가게 몇군데를 둘러보지도 못했는데 반나절은 가버리고... 뭘 사지도 못했는데 피곤해져서 밥을 먹고, 또 커피까지 마시자 그러면 정작 뭘 할 시간이 없었다;; 나 같은 경우는 필요한게 있으면 목록을 만들었다가 더 미뤄둘 수 없거나, 목록이 이미 길어졌거나, 아님 그 아이템을 파는 곳을 가게 될 일이 생겼을 때 몰아서 한번에 해결하고 보는 편이라, 혼자 하는 쇼핑을 좋아한다. 아니면 남자친구와 데이트 하는 장소가 쇼핑센터에서 가까우면 같이 해결하거나... 이성친구가 자기가 뭐 살거 있는데 같이 가자, 그러면 따라가긴 하는데, 남자들 대부분 방식이 나와 비슷해서 내 의견만 제대로 말해주면 쇼핑은 일찍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20대에 여자들과 커피숍을 갔을 때 주로 나오는 얘기는 화장품, 옷, 티비 프로그램 같은 주제가 많은데, 남자같은 공대여자(!)답게 화장도 거의 안하고 (사실 기본 화장은 하고 나오는데 하루 중에 고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들 쌩얼인줄 아는... ;;; ), 옷도 좀 대충입고 다니는데다, 대부분 저녁에 어디가서 술마신다고 집에서 티비 볼 일이 별로 없었던 나같은 인간은 별로 낄수 있는 대화가 없어서... 여자친구들과 쇼핑하고 커피숍가는 그런 소원은 상큼한 여대생들이 나오는 티비 광고같은 걸 보면서 '와, 나도 저랬으면'하는 정도의 수준이지, 현실에서 진짜 원하는건 아니였다;;;
대신 많은 시간들을 이성친구들과 놀거나 술마시거나 하면서 보낸 적이 많았는데, 그게 좋았던 건 부담이 없어서 였다. 눈치볼 것도 없고, 좀 싸가지 없게 말하면 '닥쳐라'라고 막말(!)도 할 수 있고, 언성높여 뭐 하나가지고 열나게 토론을 하다가도 술잔 치고 같이 좀 마시다 보면 또 풀리고, 사람나름이긴 해도 속깊은 친구들은 내가 무슨 고민을 말해도 어설프게 위로하기 보다 그냥 들어주고, 술이나 한 잔 따라주고, 나중에 그 말이 새나갈까 걱정 안해도 되고, 내가 좀 많이 마신다 싶으면 '그만해라'하며 끊어버리기도 하고, 같이 미친 짓을 하고나서도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고... 하긴 정말 절친인 여자친구들과 그럴 수 있는 여자들도 많던데, 어찌보면 내가 그만큼 노력을 안했던 걸수도....
어쨌건 그랬던 이성친구들이 군대에 가면서 한번 필터링이 되더니, 군대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또 한번 필터링이 됐다. 근데 진짜 군대가 사람을 바꾸긴 바꾸더라. 다녀와서 갑자기 복학생이 되더니 진짜 복학생 티 내면서 어린 애들 군기잡는 거 보면서 확 깬 애들도 꽤 된다;; 내가 보기엔 다들 얼굴이 좀 타거나 몸이 불은 (이등병 일등병때는 그래도 다들 근육덩어리더니, 제대할 때는 대부분 그게 살로 변해서 오는듯;;) 것 외에는 같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인데... 갑자기 2-3학년에 복학해서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어린 여자애들한테 '밥사줄까' 그러거나, 남자 후배들한테 군기잡으려고 하는 거 보면 문득 나도 이젠 신입생이 아니구나, 싶어 좀 슬퍼지기도 한달까.... ㅜ_ㅜ
그래도 어찌어찌 남아서 유지되던 이성친구와의 관계가 다시 시험받는 건, 누군가가 결혼을 하게 되는 경우. 사실 둘 중 한명이 연애 중이라 하더라도 친구관계는 유지될 수 있다. 물론 유지가 될려면, 가급적 둘이서만 보는 일은 피하고 여럿이 모일 때 보거나, 정말 어떤 일이 있을 때 대화하는 정도로 둘다 선을 지키는게 중요하지만... 그래도 '친구'라는게 아무리 가끔이라 하더라도 연락을 주고받고, 서로의 안부도 묻고 챙겨주는 사이인데, 둘다 다시 솔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좀 웃긴 짓이니, 그냥 자기 여자/남자친구에게 친구들과 함께 소개시키고 그냥 그 선임을 확인시키는게 낫다. 물론, 이 때부터는 내가 이성친구에게 보내는 메일/문자 등이 그연인에게도 공개된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헤어짐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하기에 친구사이는 그래도 유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먼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서로 안부를 물어가며 유지가 되던 몇 안남아 있던 이성친구들도 그들이 결혼을 하면서 거의 사라졌고, 결혼하지 않았던 이성친구들은 나중에 내가 결혼을 하자 거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드물게 연락을 주고받는 남자인 친구들이 거의 화석처럼 내 인생이 남아있긴 했는데, 그 친구들과도 지금은 내가 아기를 낳고 난 후 거의 연락이 끊긴 상태다 ㅜ_ㅜ
물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나누었던 이성친구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래도 내게 이성이지만 '친구'사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긴 하다. 지금 아기가 있고, 대부분 결혼을 한 이 상황에서도 이성친구가 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두가지인데....
- 둘 다 지금 결혼을 했지만, 결혼을 하기 전부터 이미 서로 알고 있었고, 지금은 서로를 자주 볼 수 없는 거리에 살며, 그저 온라인상으로만 유지되는 관계
- 둘 다 서로의 배우자/연인도 잘 알고, 동성인 그들끼리도 친한 친구인 사이 (즉, 난 내 이성친구의 여자친구/부인과도 '친구'인 사이)
특히 지금 남아 있는 사이는 두번째 경우가 가장 많은데, 한계점이라면 예전에 내가 그냥 그 사람과 친구였을 때처럼 이런 저런 얘기를 다 할 순 없다는 것. 이제 이런 정말 속깊은 얘기는 그 사람의 파트너와 하고, 아니면 넷이 다 모여있을 때 공개적으로 하는게 낫다는 점 - 여기서 둘만 하는 얘기란 건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그 사람의 파트너에게도 전해진다는 걸 염두에 두고 얘길 꺼내야 하는셈...
그렇다고 이성친구들과 왁자지껄 술 마시며 떠들던 그 시절이 이제와서 그립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누릴 만큼 누려서 아쉬운 건 없다), 그래도 가끔은 그들이 궁금하다. 잘 지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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