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1월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간만에 나갔다 온 카디프 시내는 벌써부터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고 거리들이 현란한 것이 정말 이제 12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내년이면 나도 영국 생활을 한지 10년째에 들어선다. 10년을 굳이 돌아보자면... 처음 일년동안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한다는게 얼마나 힘든지 알았고, 세상은 정말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이는 듯 했으며, 동시에 그동안 얼마나 좁은 시야로 세상을 살아왔는지를 깨달으면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고, 미리 도전해볼 생각을 못했던 시간들을 후회했다. 어벙어벙하던 영어는 이년째부터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는 좀 제대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완전히 적응되고 살만해진건 3-4년째, 5년이 지나면서는 영국이란 곳이 좀 지긋지긋해졌고, 6년째에는 심각하게 떠날 생각을 했다. 그러다 그동안 살던 캠브리지를 벗어나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러면서 다시 영국이란 곳에 대해 그냥 받아들이게 됬다. 사람사는 곳은 어디든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더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물론 우리 가족은 아무도 영국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국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다. 그래도 지금으로 보면 아직 몇년간은 영국에 더 머물지 않을까....
그렇게 좋든 싫든 영국에 적응해가고 있다가도, 문득 문득 한국이 미친듯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적어보는 베스트 5
No. 5. 아픈데 그냥 혼자 아파야 할 때
이번에 감기가 제대로 심하게 걸렸다. 처음에는 꼬맹이가 걸리더니 곧 남편이 걸리고, 마지막에는 내게 몰아줬는지, 나 혼자 몸살에 기침에 콧물에 목아픔에 골골거리며 1주일을 보냈다. 한국이였으면, '병원에 가보지 그랬어'라고 했을텐데... 여기서는 그런게 없다. 일단 등록된 GP에 전화를 해서 기본 몇십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통화가 되어 의사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가능한 날짜는 다음주나 그 다음주라고 한다. 행여 급하다고 오늘 만날 수 있겠냐고 Emergency 약속을 받아도, 가면 또 30분 정도 기다리다가, 막상 의사를 만나면, 5분안에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이니, 물을 많이 마시고, 정 못참겠으면 paracetamol을 몇 알 먹고 쉬다가 정 상태가 안좋으면 2주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그 넘의 '2주후'.... 속이 쓰려도, 배가 아파도, 다리를 다쳤어도, 머리가 깨질 듯 아파도, 무조건 '2주후'에도 그러면 다시 오란다. 전에는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축구를 하다가 발가락을 다쳐서 2주간 걷질 못하다가 지인의 도움으로 차를 타고 A&E에 간적이 있는데, 한시간동안 기다린 후 X-ray를 찍어보곤 뼈에 이상이 없으니 그냥 걸으라더라. 아프다니까, '그래, 아프겠죠, 그래도 뼈에는 이상없으니 걸으세요' -_-;; 이런 일시적인 아픈게 아니라 어떤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영국에서는 정말 머리아파진다. 기본적으로 2-3개월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불안한데 어떤 의사들은 제대로 검사를 안해주는 경우도 있다. 특히 내시경 검사등 장비가 필요해지는 경우, 신청절차도 까다롭고 오래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왠만한 의사들은 정말 내가 심각한 증상을 보이는게 아닌이상, 그런 검사도 안해주고 그냥그냥 넘어가려는 것 같아 짜증마저 난다. 물론 한국처럼 무조건 병원가서 뭔지도 모를 주사를 맞고 영양제를 맞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그래도 여기 시스템처럼 '왠만한건 알아서 혼자 해결하도록' 하는 태도보다는 한국 시스템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갈 때마다 온갖 병원을 순례하면서 검사를 받고 치료를 하고 왔는데 (특히 치과, 안과), 이젠 내 앞으로 된 의료보험이 없어져서 그것도 힘들다 ㅜ_ㅜ
No. 4. 그들의 그 느긋느긋한 태도에 속에서 불이 날 때
지금 사는 이 곳으로 이사왔을 때 한달간 인터넷이 되질 않았다. 이사오기 전에 쓰던 BT를 그대로 쓰는 건데, 미리미리 전화해서 이사한다고 말했더니, 새로운 주소로 옮기는데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며 빨리 transfer해줄테니 이사가기 전의 집에서 일주일간 인터넷을 못쓰는 대신 새집에서 바로 인터넷을 쓸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그래라, 했는데... 새 집에 갔는데도 인터넷이 안되는 거다. 그래서 또 전화를 해서, 또 30분을 기다리고, 상담원에서 문제를 설명하고, 상담원이 내 계정을 찾고 문제가 뭔지 확인하는 동안 또 10분을 기다리고, 그랬더니 아직 transfer가 안됬단다. 그런게 어딨냐고 따지니 지금 바로 할테니 내일정도면 될거다, 그러고, 다음날 안되서 또 전화를 걸고, 기다리고, 따지고, 확인하고... 뭐 그런 식으로 몇번을 전화하고 마지막으로 complain 메일을 보내고 짜증을 내니, 결국 설치기사를 집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한달만에 일이 해결되고, 난 또 Complain 메일을 보내고 다시 전화를 해서, 한달간 내가 인터넷을 못쓴동안의 인터넷 사용료는 낼 수 없다고 따진뒤 환불을 다시 받기까지 또 2달... 에휴.... 한국에 갔을 때 집에 인터넷이 안된다고 하자, 엄마는 바로 공급자에게 전화를 했고, 그날 설치기사가 와서 고쳐주고 가던데.....
인터넷 뿐이랴.. 영국은 그냥 대체적으로 다 느리다. 그리고 늘 절차가 복잡하다. 심지어 999에 전화했을 때도 서두르는 법이 없다;; 아무 문제없을 때는 모르지만, 집에서든 어디서든 문제가 생기고, 또 그게 바로 해결이 안되고, 그러면 그 일이 실제로 해결되는데 까지는 1달은 무슨 2-3달은 족히 걸린다. 그러다보면 가끔은 짜증이 쌓이고 쌓여서, 영국적인 예의고 뭐고 다 갖다버리고 '네 집이라도 이러겠냐, 너같으면 살겠냐'하고 짜증을 퍼부어주고 싶어진다.. (물론 그 순간부터 문제 해결 시간은 배로 늘어난다는 사실.. ) 그리고 그럴 때면 '빨리빨리'라는 한국의 서비스가 무척이나 그리워진다는거...
No. 3. 6시이후 텅빈 거리를 걸을 때
난 한국에 있을 때 보통 5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하는 편이였다. 그냥 그 해질 무렵 세상이 파랗게 변하는 순간이 좋았다. 거리에 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그럴 때 커피숍에 앉아 거리의 불빛사이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보는게 좋았다. 특히 요즘처럼 날도 추운 날이면, 그렇게 따뜻한 핫초코나 생크림 올라간 커피라도 마시며 거리의 불빛과 사람들을 보자면 왠지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어딜가도 사람이 사는 듯한 온기가 담긴 분위기. 늘 불빛이 있고, 분주하다. 한국에서 시골에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시골이라면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영국은 모든 가게들이 5시반-6시정도면 문을 닫기 때문에 거리전체가 횅해진다. 다시 7시 이후부터 저녁을 먹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고작해야 마을이나 동네에 한 두개인 펍에 한정되어 있고, 아무리 카디프같은 도시라 하더라도 그 허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래서 영국은 왠지 추운 기분이 든다. 불이 켜져 있는 집들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약한 전등 하나 키고 있거나, 그래도 커텐이 다 쳐져 있기 때문에 그 텅빈 느낌은 감출 수가 없다. 나 역시 지금은 가족을 가지고 있고, 5시면 집에 돌아오는 남편과 6시반이면 잠이 드는 아기 때문에 이제는 저녁에 밖에 나갈 일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정말.. 한국의 그 사람사는 분위기가 그리워지곤 한다.
No. 2. 음식이 그리울 때
전에도 말했듯, 난 영국음식자체에는 별로 크게 불만은 없는 편이다. 워낙 먹는 것에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살아서 그런지, 안굶고 살 수 있다면 행복한 편이다, 라고 생각한다고 할까.. 유학 초기에 정말 돈을 아끼느라 1파운드 쓰는 것에도 벌벌 떨고 가능한 싼 것들로 채운 한끼를 먹으며 '연명'할 때는, 소원이 '먹고싶은거 다 먹으며 살 수 있음 좋겠다'였는데... 지금은 돈도 벌고, 가족까지 생겼기에 양뿐 아니라 질까지 생각하며 쇼핑을 하고, 다양한 요리들을 시도하고 있는 나를 보자면, 참 나름 출세했다, 라는 뿌듯함까지 들곤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끔은 정말로 한국의 음식들이 그리워진다. 난데없이 자장면이나 짬뽕이나 한그릇 시켜먹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이런 날에는 어디가서 파전에 두부김치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냥 집앞에 나가 순대와 떡볶이를 사와서 먹고 싶고, 왕만두가 그립고, 엄마가 해주던 낙지볶음과 닭볶음탕이 그리우며, 김치가 늘 가득 담겨있던 엄마의 김치냉장고가 그립고, 오늘 점심으로는 뼈다귀 해장국이나 순대국밥을 먹었으면 좋겠고, 저녁에 동생에게 오는 길에 군고구마나 붕어빵 파는 곳이 있으면 사오라고 했음 좋겠고, 10시가 넘은 밤이라도 출출하다고 닭 한마리 시켜 먹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은 임신을 하게되면 몇배로 증폭된다. 매일 한국 음식 생각을 하고, 그게 그리워서 울기도 한다;;; 전에 임신했을 때는 김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남편이 차를 몰고 시내까지 나가 캘리포니아롤 같은 걸 사왔는데, 내가 먹고싶던 그 한국의 김밥맛이 아니라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어 남편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국수같은 게 너무 먹고 싶어서 울며겨자먹기로 와가마마에 갔었는데, 첫맛부터 내가 원하던 맛이 아니라 종업원에게 따지기까지 해서 새로운 우동을 받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원하던 게 아니라서 다 못먹고 나옴;;). 그정도면 다행인데, 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어떤게 그리워지면, 정말... 힘들어진다. 입덧도 더 심해지고, 다른 걸 먹어도 올리고, 못먹어서 울고... 어우 정말.... 호르몬과 입덧이 만났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조화란.... 외국에 사는 한국여성분들... 임신하시면.. 입덧 심할 때 초기때라도 한국 잠깐 가시던가, 아님 한국 음식 잘 하시는 분이랑 미리미리 친분을 맺어놓으세요.. 아님 남편을 일찌감치 교육시키시던가.... 음식때문에 운다는 기분.. 처음 맛보실 겁니다...
Best No. 1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지금 내게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보다 영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더 많고, 그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더 가까운 사이를 유지한다. 물론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때로 연락을 하고, 한국에 들어갈 때마다 만나곤 하지만, 그래도 굳이 외롭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덜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미친 듯이 가고 싶어질 때는 가족과 관련한 일이 생겼을 때다.
내가 박사논문을 마치고 한국에 잠시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암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는 2년을 견디다 돌아가셨는데... 그 시간이 내게는 영국에서의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였다. 마침 한국기업으로부터 입사권유도 받았기 때문에 더 갈등이 생겼었는데, 내가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셨기에 아버지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걸 더 말리셨다. 그래서 남았지만, 매일 폰에 한국 전화번호가 찍힐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강의를 마치고 나왔던 어느날 찍혀있던 부재중 전화에 놀래서 전화를 했더니 아버지가 응급실로 급히 실려가셨다길래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펑펑 울었었다. 남편이 놀라서 회사를 조퇴하고 달려오고, 몇시간내내 끊임없이 동생에게, 오빠에게 전화를 하며 상황을 물어보고, 동시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표를 알아보고.... 다행히 아버지는 다시 괜찮아지셨지만, 정말 내게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였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최소 하루 혹은 2-3일은 걸리는 거리에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가서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다음날 바로 돌아올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거... 아버지가 투병하시는 동안, 한국에 갔다가 떠나올 때마다 공항에서 아버지를 부둥켜 안고 '가지말까'하고 울었었다...
외국에 살면.. 그렇다. 가족들의 생일을 함께 할 수도 없고, 명절을 같이 보낼 수도 없고, 졸업/입학식에 가볼 수도 없고, 가족 중 누가 아파도, 힘들어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 그저 전화나 해서 목소리나 들을까... 그러고 나도 그 허한 느낌은 어떻게 채울수가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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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보다. 아니면 몸이 아파서 그런가. 아니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힘들어하는 동생과 술 한잔 같이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싫어서일까, 아니면 크리스마스라 가족끼리 뭐할거냐고 질문을 받으며 새삼 내 가족들과 명절을 함께 보내지 못한게 벌써 10년은 족히 넘어서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 일까... 그냥 한국이 그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