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말한다. 세월은 날카롭던 신경도 무디게 만들더라고..
그런데 자꾸 난 도리어 날이 서는 것만 같다.
타지생활 9년.
이 땅을 처음 밟았을 때는, 강한 아이리쉬 억양으로 Hot이라고 하는 것도 못알아들을 정도였고..
처음으로 조별발표를 하던 날, 같은 조원이 내가 할 분량까지 대신 하는 바람에 전체 클래스 앞에서 멍청한 벙어리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나중에 전체 대학원 학생회 임원이 되어 활동할 때는 여러 조직이 뒤섞인 정치활동에 끼여 등이 터진 적도 몇번이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는 '동양인은 입닥쳐라' 라는 메세지를 두시간내내 받아내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는 건 독함이다. 내가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내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나같은 존재는 금방 무시되고 말 거란거. 내 권리를 내가 목소리내서 지키지 않으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되고 결국 나만 손해란거.. 마냥 웃기만 하면 내 감정따윈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 정확히 목소리를 높여 내 주장을 말하지 않으면 내 의견따위는 무시되고 만다는 것.
그래서 그러는 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는 기미가 보이거나, 함부로 대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일단 날부터 세우고 본다. 감정적으로 대하는 대신,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그 덕에 영국 법에 대해서도 꽤 알게 되었다. 사소한 접촉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집주인이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과요금이 잘못 측정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직장에서 잘못된 대우를 받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 요구조건이 잘 받아지도록 하려면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등등..
그런데.. 가끔은 무척 피곤해진다. 정말 신경줄을 놓고 좀 쉬고 싶다.
며칠간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Property agency (부동산?)와 끊임없는 신경전을 벌이며 길고 긴 이메일을 주고 받고, 대학 측의 말도 안되는 요구에 대해 내 입장을 정리해서 통보하고, 병원에서의 일이나, 아픈 아기나, 운전과 관련된 것이나...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속이 쓰려온다. 하긴, 한국에 산들 그런 골치아픈 일들이 없겠냐 마는... 그래도 가끔은 다른 가족이나 친척 하나 없이 둥둥 떠있는 외딴 섬 같은 내 가족의 삶의 무게가.. 무척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도망칠 순 없는거니까.. 또 그렇게 방패막을 하나 더 만들고 업그레이드된 모습으로,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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