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돌아와 간만에 나간 엄마들과의 만남에서 H는 아주 조심스런 말투로 뜸금없이 어떤 브라를 요즘 쓰고 있느냐고 물었다. 수유브라를 쓰고 있다고 하니 한숨을 내쉬며 역시 그렇지... 하더니, 왜 수유브라는 예쁜 것도 없고 가슴을 제대로 받쳐주지도 못하는 거냐며 괜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없었던 5주 사이에 뭔 일이 있었길래 그러느냐 물으니, 별것도 아니고 쇼핑을 갔었다고 했다. 아기를 낳고 일년만에 이혼을 결심하게 된 그녀는 생활에 치이다가 날도 풀리자 이번에 맘 먹고 쇼핑을 갔는데.. 본인의 모습을 탈의실 거울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대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래도 그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아기 한 넷은 낳은 여자의 몸 같더라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게다가 마흔도 안된 나이에 이혼을 했으니 언젠가는 또 데이트장으로 뛰어들긴 해야하는데.. 이래서야 누군가를 새로 만날 수나 있겠냐며 한숨을 쉬어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난 격한 공감을 표했다. 솔직히 아기를 낳아보면 알겠지만... 낳은 후 그게 어디 내몸 같던가.. 처져버린 뱃살 하며, 반복된 수유로 인해 크고 늘어진 듯한 가슴, 묘하게 확장된 듯한 골반, 그나마 살이라도 안트면 다행이지만.. 제왕절개 수술이라도 한 경우 그 남은 자국하며.. 정말 한숨나오는 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전신거울은 잘 안보게 되고.. 그나마 얼굴의 붓기가 빠지고 예전 옷들이 입어지기 시작하면, 스스로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세뇌를 시키며 매일을 살게 되는 거다. 물론 예전과는 그 옷태가 달라졌지만.. 일시적일 뿐이라고, 그래도 아기를 낳고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자기 위로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만약 주위에 만나는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아기를 둔 엄마들이라면 그나마 좀 안도하게 된다. 아기 엄마들 중에는 정말 운 나쁘게도 임신 기간의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는 분들도 계시니까.. 그런데.. 그런 위안도 젊은 이들이 넘쳐나는 쇼핑 거리나, 아직 결혼 안한 아가씨들을 만나게 되면 어찌할 수 없이 깨진다.
내게는 캠브리지 유학 시절부터 알고지낸 일본 아가씨 Y가 있는데, 그녀는 정말 신이 만든 불공평함의 표본같았다. 크고 쌍커풀이 또렷한 눈이지만 동양적인 얼굴 생김새, 늘 완벽하게 셋팅된 찰랑거리는 긴 머릿결,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 그러면서도 큰 가슴, 이름만 대면 좀 알아주는 기업 사장의 딸,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유럽에서 공부하고 캠브리지에서 학사부터 시작해서 박사까지 딴 머리 좋은 수재, 그림 실력도 수준급이고, 타이 마사지도 할 줄 알고, 겸손하고 마음씨마저 고운 그녀... 아, Y... Why are you so perfect....
그렇다고 해서 그런 그녀를 무턱대고 부러워 한 것도 아니였다. 남이 원래 가지고 태어난 걸 부러워해봐야 나만 힘들어진다는 걸 아니까... 그런 태생적인 걸 제외하면 내게 그녀는 멋진 여자친구일 뿐이였고, 그런 조건임에도 왠지 남자복은 별로 없어서, 남들 다 아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차이는 걸 보면서 마음 아파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그녀가 전 남자친구가 만난 시기가 내가 지금의 남편의 만난 시기와 맞물려서 우린 곧잘 친하게 수다를 떨기도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는 동안, 그녀는 또 한번의 헤어짐을 해야 했지만.. 나보다 1-2살 어린 그녀는 내게 축하인사를 하며, 자기는 언제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느냐며 부럽다고 했다.
약간 수줍음마저 있던 그녀는 이제 젊음과 싱글의 시간을 아주 대놓고 즐기기로 한 것 같았다. 갑자기 화보같은 사진들이 페이스북에 주루루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프로필 사진을 그녀의 수영복 사진으로 대체 시켰다. 그리고 예상했듯 like수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남자들의 열망 섞인 코멘트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녀의 완벽한 몸매에 감탄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질투가 올라옴을 발견했다. 그렇다. 임신/출산을 겪어보지 않은 여자들에게는 어떤 종류의 느낌이 있다. 다른 생명의 의존성을 경험하지 못한 가벼움이랄까, 자유랄까, 변형의 과정을 겪지 않은 원자체의 모습이랄까.. 물론 이런 것도 내가 임신/출산을 겪었기 때문에 느끼는 거지.. 아기를 낳기 전에는 나역시 내 몸 하나만 다스리는데 바빴으니, 결혼한 여자들의 몸매 걱정이야 솔직히 내 알바가 아니였다. 아니, 어쩌면 몸매가 좋은 아줌마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결혼한 여자치고 괜찮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솔직히 요즘 30대는 그렇게 나이가 든 것도 아니다. 아니, 어찌보면 이제야 스스로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좀 알고, 그에 맞는 소비도 할 수 있는 나이이니, 가장 꽃피기 좋은 시기인 것도 같다. 그런데, 임신/출산을 겪고 나면 최대 5년 정도의 외모 암흑기를 겪게 된다. 암흑기를 겪으면서, 혹은 겪고나서 독하게 마음 먹고 다이어트 하고, 몸매 관리하고 다시 나름의 성숙미를 갖춘 40대를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면 왠지 여자보다 중성적 의미의 엄마로 살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매력적인 엄마가 되는 길은 그냥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길보다 좀더 멀고 힘든 듯 하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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