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살아남기

8월, 여름, 스페인, 바다

민토리_blog 2020. 8. 16. 06:03

8월 스페인의 바닷가 

 

물을 싫어하는 남편 대신 아이들 둘을 데리고 바닷가로 향했다. 쨍하게 내려쬐는 태양. 

 

띄엄띄엄 앉아있는 파라솔 아래에서 혹은 모래 사장 위에 누워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 

 

그 사이를 가로질러 파도가 바로 닿을 듯한 곳에 자릴 잡았다. 짐을 봐줄 사람이 없으니 바다에서도 수시로 살피기 쉽게. 

 

수영복 차림으로 집을 나선 아이들은 내가 짐을 내려 놓기도 전에 이미 모래사장 위에 앉아서 모래를 긁어모으고 있다. 

 

금세 모래가 섞인 눅눅한 공기가 몸을 끈적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입고 온 여름 드레스를 벗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아이들의 열광적인 격려와 지지로 입고 온 비키니. 그 비키니를 입었던 마지막 기억은 남편과 결혼하기도 전 여자 친구들과 놀러 갔던 영국 브라이튼의 바닷가였던 거 같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비키니는 껌이고 아예 웃통을 벗어제낀 용감한 여자분들도 꽤 보인다. 하긴 스페인이 남들 몸매 신경 쓰는 나라는 아니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옷을 벗었다.

 

재택근무를 하기 시작하고 모든 헬스장이 문을 닫은 후 운동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스페인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겠다,라고 다짐했지만 한 달 동안 딱 3일 했다. 헬스장이 문을 닫기 전에는 일주일에 최소 3번 운동을 갔었는데.. 

 

적당히 미지근하면서 차가운 바다에 들어갔다 나오니 햇빛 아래서 다리가 저릿한게 살 익는 느낌이 났다. 

 

선글라스를 잃어버려 실눈만 가늘게 뜨고 개처럼 모래사장을 헤집고 있는 아이들을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과 동물은 유사점이 많다. 두 손을 앞발처럼 사용해 파바박 거리며 모래를 파헤치는 모습이라든지, 뭘 하나 던져주면 그걸 잡겠다고 쪼르르 달려드는 모습이라든지, 신기하게 작으면서 말랑말랑한 모습까지도. 

 

그늘 없이 내리쬐는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있자니 눈도 따가운게 아주 피곤해졌다. 이대로 누워서 한숨 자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눈을 감았다가, 아이들이 없어지거나 물에 휘말리는 상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긴, 내 주 역할은 보초병이지. 

 

아이들이 하나 둘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파닥거렸다. 순간 '너희 그러면 머리에 모래 다 묻는데!' 하는 말이 입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막았다. 머리카락이 모래 범벅이 되는 걸 막는다고 나중에 아이들 씻길 일이 편해지는 건 아니니까. 뭐 맘대로 놀아라, 하고 마음을 놓고 나니 둘째 아이의 '모래로 몸을 덮어 내가 아이언맨으로 보이게 해 달라'하는 요구도 들어줄만하다. 

 

둘째 아이가 모래로 만든 아이언맨이 되고, 첫째 아이가 온갖 미역으로 장식된 모래성을 마무리 하고 나니 점심 먹으러 시댁 가족들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발바닥을 태울 듯 뜨거운 모래사장을 다시 가로질러 샤워부스에서 간단히 아이들을 씻기고 말려 남편과 함께 해변가 바로 앞의 레스토랑으로 보냈다.

 

나 역시 바닷물로 끈적해진 머리를 물로 헹궈 개가 털 말리듯 머리를 흔들어 물을 털어냈다. 그래도 무슨 헤어젤 바른 듯 머리카락은 뻣뻣했지만, 나쁘진 않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옷을 갈아입고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차가운 맥주가 이미 주문되어 있고, 화이트 와인도 얼음통에 담겨 있다. 

 

점심시간을 맞아 떠들썩해진 해변가 레스토랑, 쨍한 햇살, 아는 단어의 조합인 스페인어가 귓가에 들렸다가 사라지고, 잘 요리된 통새우와 오징어 튀김이 왔다 사라지고, 맥주와 와인이 차곡히 비워지는 스페인의 오후 바닷가. 

 

그냥 그랬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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