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있을 때는 크리스마스, 하면 거리의 멋진 장식과 캐롤들, 선물, 케잌 같은 걸 떠올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당일보다는 이브가 더 설레였고, 사람들로 넘쳐 터질 것 같은 밤거리를 친구들과, 연인과 걸으며 따뜻한 까페에 앉아 캐롤을 들으면서 커피 한잔에 케이크 한 조각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영국에 와서 살면서 부터 크리스마스는 조용하고 가족적인 날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누구의 집에도 크리스마스 때 초대 받지 않으면, 도리어 26일 복싱데이부터 쇼핑할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
남편과 결혼하고 부터는 줄곧 크리스마스 때 스페인에 와서 시댁 식구들과 보내는데.. 초반에야 뭣 모르니까 그냥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간 것 마냥 휴가받아 놀러간 셈치고, 놀다가 맛있는 거 많이 먹다가 왔다면, 이제 결혼 생활 3년차에 접어드니 이젠 그런 손님같은 분위기만 즐기고 갈 수 없게 되었다...
유럽에서 크리스마스라고 하면 대부분 한국의 명절처럼 가족끼리 모여 보내는 날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영국이 조금더 상업화되고 선물이 중심이 되는 크리스마스의 모습을 지녔다면,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는 좀더 종교적이면서 가족적인 분위기가 난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에 Belèn (영. Nativity) 이라고 부르는 예수 탄생 모습을 재현시킨 장식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지만, 보통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많이 사는 편이고, 영국처럼 그저 뭐든 줘야하니까 사는 선물 사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어쨌건 뭣보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만 모이는 대부분의 영국 가족들과 달리, 여기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가족끼리 저녁을 먹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또 가족들이 모여 거대한 점심을 먹고, 어떤 가족들은 그 때부터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인 1월 6일까지 거의 매일 가족들끼리 모여 식사를 같이 하는 등 행사를 한다. 시댁같은 경우는 12월 24일 (Noche buena) 저녁, 12월 25일 (Navidad) 점심, 12월 31일 (Nochevieja) 저녁, 1월 1일 (Nuevo año) 점심, 그리고 1월 6일 (Los Reyes Magos) 점심이 가족들이 모여 함께 즐기는 행사인데... 이게.. 진짜 만만치가 않다;;;;;
한국의 명절에 장만해야 하는 음식 가지가 여러개라서 스트레스 받는다면,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 때는 코스별로 준비를 다해야 해서 스트레스 받는다;; 다른 가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시댁에서는 다른 때에는 전채, 메인, 후식, 치즈, 커피와 투론 (Turòn: 크리스마스때 먹는 단 과자종류) 이렇게 준비하는 편이지만, 크리스마스 때는 기본 5코스에 후식, 커피, 투론, 거기에 각 코스마다 마시는 와인 등의 종류도 다 다르게 준비하는데... 이게진짜 보통일이 아니다;;;; 일단 식탁 셋팅도 다 새로 하고, 원래 먹고 마시는 잔이나 접시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전용 식기들이 나와야 하고, 마시는 음료마다 다른 종류의 컵과 잔들이 배치되고, 심지어 포크나 스푼도 번쩍번쩍 빛나는 (그래서 씻고 난 후 꼭 수건으로 다시 빛나도록 닦아야 하는;;) 은으로 된 것들이 튀어나오고, 코스 하나 끝나고 나면 또 새로운 접시들로 셋팅되고... 그렇게 식사가 다 끝나고 선물까지 주고받고, 그러고 나면 진짜 주방에 가득가득 식기들로 넘쳐난다;;;
한국에서는 명절 때 왠만하면 가족들이 다 모여서 음식 장만을 하지만, 손님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는 여기 풍속상, 만약 내 집에서 사람들을 초대하면 그 모든 음식준비와 뒷정리가 알짤없이 나와 내 가족의 몫이 되는거다...
특히 시어머니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시는 분이시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모든 가구와 식기들이 본인의 취향대로 맞춰져 있기 때문에, 우린 뭘 도울래도 도울 수가 없을 때가 많다. 뭐가 어딨는지 알아야 뭘 돕지;;; 그리고 섣불리 뭘 건드려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게 더 큰일이기 때문에 보통 크리스마스 오전에는 시부모님이 요리를 하시고, 셋팅을 하시는 동안, 우린 조용히 짜그러져(!) 있거나, 이번에는 아이들이 방해가 되지 않게 그냥 산책을 나갔다 왔다. 그리고 식사가 다 끝나면 설겆이를 하거나 정리를 돕는 편이다 (식기세척기가 있음에도 사용하질 않으신다!!!). 사실 이것도 우리가 지금 시부모님 댁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하는 일이지, 보통은 남아서 정리를 돕는 것도 없이, 다들 그냥 헤어지고 뒷정리도 초대한 사람의 몫이 될 때가 많다. 집안의 첫째 며느리이신, 내게 형님되는 분이 식사가 다 끝난 후, 그냥 '메리크리스마스,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봐요'하고 집에 가시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한국이였으면 욕을 와인 한잔 가득차게 얻어먹었을테지만, 스페인이라 그런게 가능하다 (사실 영국에서도 가능;;)
이번에 영국에 있는 둘째를 임신한지 7개월되는 친구 T같은 경우, 자기집에서 크리스마스 점심을 준비해야 했는데, 의사라서 당직까지 선데다가, 첫째아이와 남편까지 아파서 도와줄 수가 없는 상황이라 힘들고 힘들어서, 시누이에게 제발 디저트라도 좀 준비해와달라, 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시누이가 아주 쿨하게 '별로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 전에 부탁했는데!!!) 준비 못하겠다'하고 거절을 하는 바람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짜증을 감추며 크리스마스 점심 준비를 혼자 했다고 했다 - 한국이나 영국이나 밉살스런 가족 멤버들은 어디나 있음;;
스페인 남편과 결혼해서 현재 발렌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두아이의 엄마 영국인 C는 저번주에 엄마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했는데... 자기에게 크리스마스는 아침에 파자마 차림으로 일어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있는 선물을 열어보고, 부모-자식들만으로 구성된 가족끼리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기며 같이 게임도 하고 노는 날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은 후, 그날 오후나 26일에 조부모님이나 친척들을 보러가기도 하지만, 크리스마스 당일날만은 온전히 자기 가족들과 보내는 날이라고... 그런 그녀에게 24일 저녁부터 조부모, 삼촌, 이모, 사촌까지 다 모여 어울리는 스페인의 크리스마스는 좀 벅찼던지, 견디고 견디다가 올해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I want my Christmas only with my family - which means your parents and sister are not invited!" 그녀의 야심찬 선언(!)에 그녀의 시댁가족들은 발칵 뒤집혔고, 몇주째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 이후 아직 소식을 못물어봤는데, 결국 어찌됬을라나.... ;;
한국에서 명절 때 언제 시댁, 친정으로 갈 것인가, 에 대한 신경전이 벌어진다면, 여기서도 크리스마스 때 누구의 집에서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건 갈등의 중심이 되곤 한다. 스페인에서는 그래도 가족끼리 보내야 하는 날이 많아서, 보통 시댁에서 이브를 보냈으면 친정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 내년에는 바꾸기, 그렇게 하는게 일반적인데...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그래도 나같은 경우처럼 크리스마스를 따로 챙기지 않는 문화권에서 온 경우, 누구네 집에 갈 것인가, 그런 문제로 갈등이 빗어질 경우는 극히 드문데... 올해는 좀 예외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아이가 둘이고 어려서 나 혼자 한국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긴 힘들고, 남편과 같이 가자니 휴가 날짜가 걸리고.. 그렇게 보다보니 가장 길게 휴가를 낼 수 있는 시기가 크리스마스 때 쯤이라, 내년에는 스페인에 오지 말고 한국으로 가자, 하는 얘길 했는데.... 그걸 남편이 날 것 그대로(!) 시부모님께 얘길 해버려서 - 저희 내년에 여기 안오고 한국 갈거에요, 그냥 이렇게 말하고 만 거죠;; - 시부모님은 내가 여기 혼자 와있는 동안 기분 상한게 있어서 이제 안오려고 하는건가, 하는 오해를 하셨고, 나 같은 경우는 거기 없었던 지라 남편에게 '그래서 뭐라셔?'하고 물으니, 또 남편이 날 것 그대로 '별말 없으시던데? 근데 우리 안오면 내년엔 따로 크리스마스 초대 안하실거라고 도리어 좀 안도하시는 것 같던데?'하고 말하는 바람에, '우리가 여기 와있어서 얼마나 불편하셨음 차라이 안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구나' 하고 오해를 했더랬다;;; 그런 오해로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때까지 좀 불편한 이상기류를 느끼다가, 저녁 때 다시 얘기를 꺼내서 풀게 되어 다행... 에휴... 힘들다 힘들어;;
그외에 막상 가족들끼리 모여서도 미묘한 갈등이 벌어질 때가 있는데.. 보통 나같은 경우는 뭔가 좀 불편한 기색이 흐른다 싶으면, '난 외국인. 나 스페인어 이해못함' 하는 표시를 얼굴에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편인데... 그것도 어떨 땐 좀 힘들다;; 특히 올해는 크리스마스 때 시댁에 오시기 전에 남편 형님 커플사이에 좀 다툼이 있었던지, 집에 오셔서도 냉랭한 기운이 감돌아서 불편했다. 그런데 거기에 조카가 점심을 먹다가 계속 투정을 부리는 등 양념을 끼얹고.. 형님께서 나름으로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내 둘째 꼬맹이와 장난을 치며 놀아주시다가 손을 잘못 잡아주셔서 꼬맹이 팔이 빠지는 사고가 벌어졌는데... 그 시점으로 두 분 사이에 긴장이 최고조가 되더니... 우리가 급히 꼬맹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다녀온 사이, 두분이서 결국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한 판 벌이시고 돌아가셨다 했다;;; 안그래도 거의 전투 지휘 하듯 크리스마스 되기 일주일 전부터 매일 긴장상태이시던 시어머니가 형님내외분들의 다툼으로 더불어 폭발하셨고;; 나 역시 이제 5개월 된 아이를 벌써 두번째로 응급실에 데리고 갔다 와야 했던터라 심신이 지칠때로 지쳐서, 그냥 당장 내집으로 텔레포트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하아.... 그렇게 가까스로 크리스마스를 넘기는가 싶었는데, 한밤중에 첫째 꼬맹이가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우는 바람에 또 한번 난리가 나고...
그날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다음날 보니 조카에게 선물로 준 장난감이 '그거 이미 있다'라는 이유로 다시 우리에게 반품되는 바람에 또 멘붕이 오고... 아니, 맘에 안들면 알아서 원하는 걸로 바꾸라고 영수증까지 넣어줬는데, 뭘로 바꿔오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이미 이거 있으니 너희가 알아서 해라, 하고 아예 가지고 가지도 않은건 도대체 무슨 심사인건지;;; 하여간 힘들다 힘들어;;
그렇게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아~~주 복잡다난한 일들과 감정을 남겼고, 여전히 줄어들줄 모르는 엄청난 양의 음식들을 남기고 지나갔다. 또 새해맞이는 어떻게 지나갈런지... 에효...
이런 날것의 모습들을 내게도 보여주는 걸 보니 이제 확실히 가족은 가족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도 가능하면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빛나는 것들만 봤으면 하는 생각에 좀 아쉽기도 하고.. 그렇다.
다들 어떤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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