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책읽기

[당신의 신] 쉽게 끊어지지 않는 관계의 끈

민토리_blog 2019. 6. 24. 05:15

이번 주말에는 친구네 아이 생일파티가 있어서 간만에 친구들과 가족 동반으로 다 모였다. 계속 꾸리꾸리하던 날씨가 어제는 간만에 진짜 여름 마냥 좋았고, 그래서 홈파티를 계획하고서도 날씨가 안좋으면 어쩌나 계속 고민하던 친구 T의 얼굴도 피었다. 25명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들이 초대된 거대한 생일 파티는 12시 부터 시작되어서 2시가 넘어가자 슬슬 다른 사람들은 빠지고 아주 친한 친구들만 남아서 오후 5시까지 이어졌다. 정원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중 친구 N의 폰이 자꾸 울리더니 그걸 확인하는 그녀의 표정이 자꾸 굳어져 갔다. 
덩달아 그녀 옆에 앉아 있던 T와 내가 말이 적어졌고, 무슨 일인지 몰라 서로 눈빛만 교환하다가 조심히 묻자, N의 전남편 때문이라고 그녀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전남편이 갑자기 정원을 다듬고 싶다고 울타리 다듬는 기계(hedge trimmer)가 필요하다고 그녀 보고 가져다 달라는 거였다;; 우린 뭔 소리나며, 그 사람은 너 지금 애들 생일 파티 와있는 거 모르냐고 하자, 아는데 그만큼 오래 있었으면 된 거 아니냐, 당장 가지고 와라, 뭐 그런 소릴 하고 있다는 거다. 그녀가 그렇게 급하면 스스로 집에 가서 가지고 가라, 라고 하자 그건 귀찮다고 싫다고 하고, 그럼 나중에 아이를 데려다 줄 때 가져다 줄테니 그 때 해라, 했더니 그럼 그녀보고 자기가 울타리 다듬을 때까지 집에서 기다려라, 뭐 그런 요구를 하고 있었다... 

N과 그녀의 전남편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고등학교 때 사귀고 연애를 오래하다가 결혼한 경우인데, 둘 사이에 만 5살인 딸이 하나 있고, 그 딸이 만 2살이 좀 넘었을 때 이혼했다. 거의 가족처럼 같이 있었다는 그녀의 전남편은 복잡한 가족 사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의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건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모든 걸 기대기 시작했다고 했다. 마치 그녀가 자기 엄마라도 되는 냥, 집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건 그녀였고, 툭하면 일을 그만 두는 그 때문에 경제를 책임지던 것도 그녀였다. 싸우면 토라져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거나, 피곤하다고 하루종일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크게 싸움을 할 때마다 그는 항상 상처받은 모습으로 자기 사정을 다 알면서, 어떻게 네가 나한테 그럴 수 있냐, 하는 소리를 하거나, 심지어 그녀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느니 하는 소리까지 자주 해서 결국 그녀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한다. 그걸 견디다가 결국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까지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이혼을 결심했고, 그걸 말할 용기와 그의 모든 히스테리까지 받아내며 결국 이혼했지만... 그 오랜 세월은 그녀를 여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제는 그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도리어 발이 더 묶여버린 듯 하다.... 

김숨의 ‘당신의 신’. 한국에서 가지고 온 책 중 하나인데, 마음이 좀 답답해 쉽게 읽으려고 폈다가 단숨에 읽으면서 그녀 생각을 했다. 이혼을 하고도 자유롭지 못한 그녀의 모습. 다른 사회, 환경, 나라임에도 그녀의 모습은 한국 소설 속 인물들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고... 아니, 도리어 이 소설은 내가 영국에서 만난 여러 국적의 여인들을 생각나게 했다. 결혼, 아니 ‘관계’라는 이름 아래 여러 모습으로 묶여 있던 그녀들. 아무리 이혼이 좀더 쉽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도, 관계의 상처는 국적을 떠나 사람 관계에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건지, 법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해도 한번 닿은 인연의 끈이 어찌나 질긴지... 보고만 있어도 한숨이 나던 관계들. 이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같아, 하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던 친구 H는 아이의 양육권을 두고 벌써 일년 넘게 몇차례 재판을 하고 있고, 도저히 아무 문제 없어 보이던 Y는 어느날 갑자기 상대방의 외도 소식과 함께 이혼을 통보받고.... 그토록 서글서글하고 사교성 좋은 남편을 둔 S는 정작 집에서 남편을 본 적이 별로 없고... J 의 남편은 파티에서 술에 취해 J의 친구를 추근거리고... 그들 모두 이혼 하거나 이혼을 생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남편이 그녀들의 인생에서 사라지진 않았다. 아니, 어떤 남편들은 참 손쉽게 손을 털고 새 삶을 시작한 것도 같던데... 최소한 그녀들의 인생에서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새하얀 옷에 쏟은 커피 자국처럼 아무리 씻으려 해도, 뭘로 덮으려 해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결국 파티의 마지막에 아주 우울한 표정으로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일어나는 N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그 남자는 왜 아직도 그러냐, 등등의 소리를 하긴 했지만... 결국 침묵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던 거다. 그의 말도 안되는 소리를 결국 받아 주고 있는건 그녀라는 거. 새로운 사람을 소개시켜 주려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마다하고 있는 것도 그녀이고... 아마도 그녀가 정말 독하게 그 남자를 ‘버릴’ 결심을 하지 않는 한, 그 남자는 끝까지 그녀를 휘두를 거란 거... 만약 이 소설의 영문판이 있다면 아마도 주저없이 그녀에게 선물했을 거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녀도 그녀의 전남편에게 말할 수 있기를,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