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책읽기

[The Art of Being Normal] 생각보다 차별적인 사회

민토리_blog 2018. 11. 21. 06:46
영국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과목 중 하나는 통계학이다.  저번주부터 확률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강의 준비를 하다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Mutually exclusive events’ (상호 배타적인 사건?)와 ‘Collectively exhaustive events’ (전체 포괄 사건?)의 예시 때문인데... 
보통 통계학에서는 위의 사건들의 예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게 ‘성별’이다. 즉, P(Male) and P(Female) are mutually exclusive and collectively exhaustive 라고 예시를 드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이 예시가 별 문제가 없었는데... 올해 갑자기 왜 고민을 하게 되었냐면, 가르치는 학부생들 중 한 명 때문이다. 
분명히 학적에 기록된 성별은 남자지만, 실제로 만나면 ‘남자’라고 할 수 없는 학생. 다소 말투나 행동이 여성스럽다거나 그런 걸 떠나서, 만날 때마다 그 학생의 모든 것이 내게 ‘저 사람은 여자다’라고 말해주는 학생. 
혹시라도 내가 확률론을 설명할 때, ‘남자’와 ‘여자’는 한 사람이 남자인 동시에 여자일 수 없듯 이런 걸 상호배타적인 관계라고 한다, 라고 말하면 괜히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까봐 걱정이 되서 차마 이 예시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결국 강의 자료에서 성별과 관련된 걸 다 빼버리고 다른 예시들로 대체했다. (예를 들면, 남자, 여자 대신 스무살 나이 집단과 마흔살 나이 집단을 쓴다든지..)

그런데 이번 기회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어가 의외로 성차별적인 언어구나, 싶은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성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언어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지칭어가 영어에는 거의 없다. 대부분 ‘he’ /‘she’로 시작하기 때문에 당장 그 사람의 성별이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호칭때문에 사람을 만나자 마자 나이부터 깐다면, 영어권에서는 (사실 대부분의 유럽권 언어) 성별부터 까고 시작하는 거다. 
그런 경우에 transgender나 아직 treatment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성정체성 (gender identity)이 불분명한 사람을 지칭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아니, 심지어 스스로의 성정체성에 대해 강한 반감이나 혼란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생활의 말 자체가 꽤 괴롭게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번 자신이 바라지 않는 본래의 성별로 계속 불린다면, 자신의 성정체성을 강요 당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영어’가 성(gender)에 상당히 배타적인 언어라는 것, 그리고 영국 (영어권) 사회가 덩달아 상당히 차별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예를 들면, 결혼하자 마자 여자의 ‘성 (surname)’이 바뀐다는 것, 그 덕에 가족이든, 십년지기든, 결혼식에 초대된 사람이든, 얼굴 한 번 본 적 없이 이메일로만 소통하던 업무 관계자든 그 여자의 혼인상태를 알 수 있고, 특히 앞에 붙이는 호칭 - Miss, Mrs, Ms 때문에 생판 처음 보는 고객센타 직원도 여자의 혼인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Ms가 그런 걸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중립적인 호칭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여기서는 여자가 Ms를 쓰면 이혼했다고 생각한다;;). 반면 남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달라질 게 없는 거다. 그리고 웃긴 건, 난 왠만한 상황에서는 저 Miss, Mrs, Ms를 쓰기 싫어 ‘Dr’를 앞에 붙이는데, 나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꼭 당연하게 내게 보내는 메일에 날 ‘He’로 지칭한다 -_- 물론 내 이름이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이름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한번의 의심없이 ‘He’라고 지칭하고, ‘Dr’의 옵션이 없을 때, ‘Mrs’라고 붙이면 아주 당연하게 내 남편 역시 나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더 웃긴 건, 논문을 읽다보면, 사실 ‘Surname’을 중심으로 인용하기 때문에 왠만해서는 성별을 알기 어려운데... ‘XXX-YYY’의 성을 가지고 있던 학자가 갑자기 ‘XXX’만으로 논문을 내기 시작하면 학회에 대놓고 ‘저 이혼했어요’하고 광고하는 효과도 난다는 거다;; (그래서 이미 학회에 있다가 결혼하는 여자들 경우 성을 일부러 바꾸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생각해보면 좀 어이가 없다. ‘선진국’이니 뭐니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가 사실 꽤나 차별적인 언어와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특히 최근에 있었던 여러개의 사건들. 미국의 Kavanaugh 사건, 그리고 영국의 Lord Lester 사건. Sexual assault allegation 에 연루된 두 powerful white male, 그리고 그들의 피해자인 두 명의 여성들의 여전히 충격받고 상처받고, 심지어 화난 목소리조차 그대로 묻혀버리는 걸 보면서... 이 사회를 정말 ‘선진’국이라 불러야 하나, 하는 씁쓸함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에 눈이 갔다. 아이들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표지가 맘에 들어 덩달아 빌려서 읽은 책. 사실 이 책은 ‘청소년’ 부분에 꽂혀져 있었는데, (만) 15살 두 학생의 성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여자가 되고 싶은 David, 그리고 가능하면 사람들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비밀을 간직한) Leo. 더이상 얘기하면 왠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은데... 영국 사회를 꽤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마지막을 꽤나 청소년 소설답게 마무리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 자체가 뭔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소설이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건 최근에 더 많이 나타난 현상일까, 아니면 원래 부터 있었는데 최근에야 드러나기 시작한 걸까. 그리고 여전히 꽤나 차별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습관을 가지고 있는 이 사회는 얼마나 이 다양한 성적 지향성/정체성, 그리고 성정체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걸까...  아니, 당장 ‘통계학’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