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역마살 같은게 있다.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했다. 학창시절 때는 그런 충동의 시간이 찾아오면 무조건 걸었다. 일부러 안가본 골목길들만 골라서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후에는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내키는 곳으로 가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간 후 그곳을 하염없이 걷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한국을 떠나온 후에도 그런 충동이 들면 여전히 걸었다. 그런 열기가 쌓인 어느 날에는 충동적으로 자전거를 구입한 후, 다음날 새벽 프랑스 파리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린 적도 있다. 그것도 청바지를 입고서, 숙소하나 예약하지 않고, 지도도 없이... (브라이튼에서 파리까지 가는데 4일 걸렸다;;)
아이들이 생긴 후 가장 견딜 수 없을 때가 그런 열기가 찾아올 때다. 창이 넓은 거실 창가에 앉아 나무가 우거진 정원을 바라보다보면 가슴 깊숙히 열기가 끓어오름을 느낀다. 서서히 뜨거워지다가 결국에는 답답해진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겠다. 어딘가 멀리,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는거다. 머리속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차를 끌고 가버릴까. 지금 당장이라도 유럽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 머리속에서 날뛰기 시작하면, 어딘가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그럼 마치 냉수가 뿌려진 것 마냥 열기가 식어버린다. 아니, 억눌려버린다. 제대로 태우지 못한 장작처럼 매운 연기만 뿜어낸다.
최근에 이렇게 가슴 속에 연기가 가득 차고 있었다. 자꾸 몸이 아파왔고 무력해지고 답답해졌다. 그래서 급기야 한 날에는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남편에게 일방적인 통보를 남긴체 폰을 꺼버렸다. 그렇지만 어딘가로 갈 순 없었다. 난 여전히 해야할 일을 앞에 둔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고, 때로 머리가 뿌옇게 흐려진다고 생각하면 그저 커피 한잔을 마셨을 뿐이다. 나중에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난 그의 눈을 제대로 보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 라고 말하며 같이 아이들 저녁을 챙겨 먹였고, 목욕을 시켰고, 이야기를 읽어줬고, 재웠다. 그리고 남편에게 질문하거나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헬스클럽으로 가버렸다. 헬스클럽에서 난 원래 뛰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미친듯이 런닝머신 위를 달렸고, 묵묵히 원래 하던 루틴대로 헬스클럽 이곳 저곳을 누비며 운동을 마쳤다. 샤워를 하면서 마치 눈물이라도 날 것처럼 울컥 했지만, 울진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지만, 지갑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그저 얌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주차를 했고,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 남편에게, 그저 얼굴만 잠시 비춘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남편이 다가와 내게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한 장은 비행기 티켓. 그리고 나머지 한 장은 호텔 예약권
내 생일이 끼어있는 날짜를 맞춰서 2박 3일, 스페인 남쪽 도시로 나 혼자 휴가 갈 수 있는 선물을 준거다. 이 종이 두 장을 받고서... 난 거의 오열하듯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건 기쁨의 눈물과는 꽤 거리가 먼 눈물이였다. 내가 놀라면서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불쌍한 남편은 그런 내 반응에 놀래 나를 달래지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나인데... 나 역시도 역마살이 홧병처럼 돌아와 나를 가라앉히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막상 떠날 수 있는 티켓을 마주 하고 나니...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이... '이젠 내 가족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구나' 싶은 상실과 슬픔인거다. 내가 요즘 이토록 우울해 해서, 남편이 나를 이렇게 먼 곳으로 혼자 보내버리려는 거구나... 이젠 내 아이들에게서도 멀어져야 하는구나... 내 생일을 또 나 혼자 보내야 하는 구나... 등등.. 이런 사실과도 무관하고, 남편말을 빌리면, '말도 안되는' 생각과 감정들이 나를 덮었다. 그래서 마치 통곡하듯 서럽게 한참을 울어댔다.. 내가 이런 감정들을 떠듬떠듬 울음 사이로 내뱉아 내자, 그제야 남편은 내 곁에 와서 달래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이나 울고 떠들어 대다가 진정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머리 속이 좀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떠나고 싶다는 감정.. 그건 무작정 '떠나고 싶다'라는 게 아니라, 내가 있을 곳을 찾아헤메고 있는 거였다. 내게 가족들이 있던 한국의 집은 내게 '집/안식처'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고, 그래서 난 늘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했다. 한국을 벗어났지만, 여전히 영국은 내게 낯선 곳이였고, 나는 여전히 힘들었고 혼자였다.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겼지만, 뭐랄까.. 이제는 내가 없어졌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떠나고 싶어했다. 그저 나일 수 있었던 과거의 순간 어딘가와 지금의 내가 아닌 가상의 나 어딘가가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싶어했던 거다. 그럴 때면 남편과 아이들과 아무리 멀리 휴가를 간다해도 갈증이 났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을 때, 공간과 상관없이 나는 그저 지독히도 현실적인 지금의 나일 뿐이였으니까. 그런데 우습게도.. 막상 정말 혼자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니 덜컥 겁이 나고 고통스러웠다. 혼자 여행가는 것에 대한 겁이 아니라, 남편과 아이들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에 대한 겁이 났다. 그리고 마치 내가 이들에게서 찢겨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마치 이곳에도 내 자리가 없는 걸 확인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더군다나 내 생일에... 이제껏 생일날 축복보다는 외로움과 괴로움의 기억들이 더 많았는데... 그래서 늘 생일이 찾아오면 더 우울했었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작년에 말을 할 수 있게 된 첫째 꼬맹이가 내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작은 꼬맹이가 박수를 쳐주고, 남편이 준비한 케익을 함께 나눠먹은 후부터.. 뭐랄까.. 이제는 내 생일을 챙겨도 되는 정당한 이유가 생겼다고 할까..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작은 생명들이 존재하는 거니까.. 그러니 내가 이 세상에 그리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라고... 그래서 생일날이 끼여있는 그 휴가 선물을 받았을 때 더 슬펐던 거다. 왜 또 혼자여야 하냐고....
그래서 결국 남편의 휴가 선물은 취소시켰다. 그대신 우리는 다른 도시에 있는 맛있다고 소문난 말레이시안/중국 음식점에서 아이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고, 그 도시에 있는 성이 보이는 곳 바로 근처의 호텔에서 하루밤 머문 후 다음 날 남편이 휴가를 내고 그 곳에서 하루를 보낸 후 집에 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렇게 한바탕 드라마를 찍은 다음날, 난 다시 폰을 켰고, 취소시킨 약속들을 바로 잡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역마살의 열기도 사라졌고, 매운 연기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다행이였다. 이제 내 곁에 있어주는 이들을 제대로 볼 수 있어서. 그들이 내게 주는 의미를 이제야 바로 알 수 있어서. 나는 심지어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내 생일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이 불러주는 어설픈 생일 축하 노래와 케익을 더 들뜬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그 작고 빛나는 눈빛들를 기대하면서.. 살아있어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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