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던 엘리엇의 시의 앞머리에 그것이 사실일 수 밖에 없다는 듯 단호하게 새겨져 있던 첫 문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 시의 내용이 뭐였는지, 그 시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는지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그 첫문장만은 계속 가슴 속에 남아서 3월말에서 4월을 보내는 동안 항상 공사중 표시등마냥 머리속에서 경고 상태를 표시해주고 있었다. 솔직히 언제부터 그 구절을 쓴 약 삼키듯 차마 외면하지도 못한체 봐 왔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내게 4월은 꽤 끔찍한 달로 다가왔으니까.. 그래서 3월말이 되면 늘 짐짓 모른체 한다. 다음달이 마치 4월이 아닌냥. 그리고 4월이 되면, 가능하면 숨죽인체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너무 기대하지 말 것, 너무 들뜨지 말 것, 너무 화내지 말 것,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넙죽 엎드려 마치 바닥인체 누워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4월은 내게 꾸러미 하나를 던져주고 간다. 마치, 내 앞으로 당연히 와야할 택배를 배달해주는 것마냥.
굳이 생각해보자면, 진해로 가던 그 버스 안에서 였을거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있었고, 부활절이였고, 길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이며 분홍빛으로 물든 거리며, 모든게 화사해보였다. 버스 안에서 예상치 못했던 죽음을 통보받고 가는 나만 어두워보였다. 아니, 그 때는 정말 나만 혼자 먹구름사이에 가려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처음으로 견뎌왔던 시간들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거, 왜 그랬나 싶게.. 그 때 생각했다. '잔인하다'고..
내가 기억하는 선에서 처음 맞았던 잔인했던 4월이 지나간 후, 그 후 어느 해 4월에는 첫 남자친구였던 사람이 내게 말기암이라고 고백했으며, 결혼을 약속했던 오래된 남자친구와 헤어졌고, 아빠는 암을 통보받았고, 그 아빠를 또 4월에 보내드렸다. 몇번인가 작고 큰 실패를 맛본 것도 4월이라 어느 순간에는 '그럼 그렇지, 도대체 뭘 기대한거야' 싶어 체념하다가, 또 한편으로는 '망할 4월'하고 혼자 욕을 내뱉기도 했다. ..
그리고 올해. 이미 몇번이고 씁쓸한 경험들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몸을 낮추고, 이미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동면기 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가 물에 빠지고, 다치고, 그런 일들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만한게 어디냐고, 감사한다고, 다행이라고, 별 거 아니라고 스스로 토닥거리며 넘어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4월의 마지막 주. 남편은 이미 1주일정도 스페인으로 출장 가 있는 상태다. 그래도 괜찮다고, 혼자 이정도 감당은 할 수 있다고 토닥이며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그는 오늘밤 영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였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키즈카페에서 친구를 만나고 있었다. 친구에게, "I'm so relieved that April is almost over"하고 농담인듯 말을 하고 웃었다. 그런데 오후 3시 반쯤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끄러운 소리들 틈으로 그가 '지금 통화 가능하냐?'하고 물은 후 (이미 이때 나는 긴장했다..),
"I can't hear you properly, but if you can hear me, listen what I say. My grandma died"
덜컥, 하고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울렸을 때 나는 이미 까페 밖으로 달려나가고 있었고 거의 제정신도 아니였다. 그의 할머니. 몇주 전에 스페인에 갔다가 봤던 분. 그 때 거의 1년만에 그분 얼굴을 보고 울컥 울음이 나올 뻔 한걸 참고 돌아섰었다. 갑자기 너무 늙어버리셔서, 아니 그것보다, 마치 내부의 전등불을 꺼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 분을 뵙고 난 후, 밖에 나와 남편 손을 잡고 울면서 그랬었다. 우리 크리스마스 되기 전에 다시 한번 오자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죄송하다고.. 말씀으로는 치매기가 생기셨다는데.. 기억을 못한다기 보다.. 많이 그리워하고 계신 듯 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얼굴을 잡고 놓을줄 몰라하셨고, 내 얼굴도 몇번이고 쓰다듬어 주시고, 손을 잡아주시고, 남편에게는 안아주시며 'Te quiero' (너를 사랑한다) 하셨다고 했다. 나는. 정말로. 그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분이 꽤나 좋았다. 스페인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한국여자와 동양인이라고는 집 앞 거리에 생긴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사람밖에 모르시고 귀도 좀 멀어버린 스페인 할머니가 제대로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 순 없었지만.. 우린 책을 통해 가까워졌다. 처음 조부모님댁에 갔었을 때, 다들 스페인어로 대화하고 있을 때, 혼자 멀뚱히 거실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할머니 전용 의자 옆 테이블에 놓인 책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 중 몇권은 나도 읽어봤거나, 읽어보고 싶어 했던 책들이라 반가웠다. 처음으로 관심사가 생겨서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 대화를 시도했고, 그 때 처음으로 할머니가 눈을 빛내며 나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걸 알았다. 할머니 역시 좋아하는 책이 생기면 그 작가의 모든 책들을 구해 읽어보는 스타일이였고, 의외로 우리는 좋아하는 책의 스타일도 비슷했다. 그렇게 찾아뵐 때마다 책앞에 글귀를 적어 한권씩 드렸고, 할머니는 그 오랜 시간동안 모아두셨던 이런저런 작은 것들을 닦아서 내게 선물이라고 주셨다. 사하라 사막에서 태어나신 할머니, 여행을 좋아하셔서 젊을 때는 이곳저곳 다니시다가, 성격 강하고 고집 센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할아버지 만나셔서 그 후 발렌시아에서 평생을 지내오신 분. 당신 죽고나면 화장해서 재를 발렌시아 바닷가에 뿌려달라 하셨다. 그리고 그 말에 남편과 나는 '그거 불법일지도 몰라요 ㅎㅎ'하고 농담하며 웃었다...
남편은 오늘 영국으로 돌아오기로 했던 일정을 바꿔서 발렌시아로 가기로 했다. 따로 장례식은 하지 않고, 내일 화장할거라고 한다. 남편과 의논 끝에 난 아이들과 영국에 남아있기로 했다. 남편이 언제 영국으로 돌아올지는 아직 모르겠다. 솔직히, 영국에 아이들과 혼자 남아있는 것보다, 그렇게 갑작스레 그분이 스페인에서 4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다들 점심을 먹을법한 오후 2시에 그렇게 숨을 놓기로 결정했다는게 믿기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렇지만, 나를 빼고 스페인의 가족들은 모두들 이미 예상을 했다는 듯 의외로 침착하다. 심지어 남편마저도. 어디선가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스페인어들 중에 그 분의 상태를 계속해서 알리던 대화가 있었겠지. 그저 나만 이해하지 못한거다. 나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던 거다. 아버지의 죽음도 내게는 귀국한지 3일만에 일어난 충격이였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이미 몇달 몇년 계속 준비를 마쳤던 상황이였던 것처럼. 이럴 땐 이렇게 나와 있는 내가 싫어진다. 도대체 뭘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아끼는 사람들의 일상도 알지 못한체, 그들에게 일어나는 중요한 일들에서도 비껴난체 이렇게 지내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고 아낀다'는 것도 위선이 아닐까. 여기서 알고 지낸지 고작 몇년밖에 안되는 사람들이 작년 크리스마스 때 뭘 했는지, 자녀 생일에 어떤 케익을 줬는지는 알면서, 몇십년 알고 지낸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스토커를 만나 몇달간 고생하다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도, 몇번이고 병원 입원을 하며 수술을 받은 것도, 다 모르다가 아주 뒤늦게, 상처에 딱지가 내려앉은 후에야 듣게 되는 것. 그럴 때마다, 처음에는, 왜 말을 안했어! 하다가, 금새 그 이유가 내가 멀리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차마 그렇게 따져 묻지도 못하고, 뭐라 할말도 잃은체 고개를 숙이거나, 끄덕이거나, 아니면 '미안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
이제 발렌시아에 도착했다고 전화온 남편의 목소리는 차분한데, 나만 말도 잊지 못한체 꺼이꺼이 운다. 할머니에 대해 남편의 가족들보다 몇백분의 일도 안되는 기억과 추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스페인으로 가지도 못하고, 간다고 한들 제대로된 스페인어로 할머니에게 내 감정조차 제대로 말 할 수 없을 내가, 그렇게 서럽게 울고 운다. 오로지 할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인지, 지나온 잔인한 4월에 얽힌 슬픔이 얽키고 얽켜 터져나오는건지. 이젠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일이 지나가고, 5월이 무사히 다가오기를.
'아기와 살아남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있어야 할 곳 (0) | 2016.05.25 |
---|---|
[사소한 인간관계] 우리 가끔은 그냥 bitchy할 수 없을까? (0) | 2016.05.18 |
참 꾸준하구나 (0) | 2016.03.17 |
신데렐라 같은 기분 (0) | 2016.01.25 |
한국에 다녀오다 (0) | 2016.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