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주에 대학에서 크게 미팅이 있어 다녀왔다. 보통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있는 동안 집에서 일을 하고, 이메일이나 고작해야 스카입 정도로 일에 관련된 대화를 하다가, 새해도 되었고, 올해 Full-time 복직에 관한 것도 의논하기 위해 대학까지 나간거다. 그날을 맞춰서 일부러 둘째의 유치원도 하루 더 예약해놓고, 하루 전부터 입고 갈 옷도 선택해놓고, 그렇게 온갖 쇼를 했건만... 마치 그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엄마로서의 네 삶이 중요하냐, 아니면 정말 너라는 인간의 삶이 중요하냐'하고 시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둘째 꼬맹이가 약속 이틀 전부터 비실비실 아프기 시작하는거다;; 감기에 걸린 건지, 유달리 잠도 많이 자고, 깨어 있는 시간에는 내게서 안떨어지려고 보채고, 울고;;; 그러다가 딱 그날 당일에는 절대 새벽에 깨는 법이 없던 둘째가 5시부터 기침을 하면서 울고.. 안그래도 긴장이 되어서 잠도 설쳤는데, 그렇게 새벽에 깨서 아이를 달래 재운 후부터는 잠도 오지 않았다.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이 엉키기 시작하고... 결국 남편이 일단 첫째를 원래 계획대로 아침에 유치원에 데려가고, 난 아침에 둘째 상태를 보고, 괜찮으면 대학으로 가는 길에 아이를 유치원에 맡기고 상태가 안좋으면 남편이 반차를 내고 집으로 와서 아이를 돌보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남편이 옆에서, '네게 중요한 미팅이잖냐. 걱정하지말고 가라'라고 응원해줘서 마음을 잡을 수 있었지만, 정말 새벽에는 마음이 뒤엉켜 힘들었다. 미룰까, 생각도 했다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왜 하필 오늘, 하는 누군가에게인지 모를 원망의 소리도 해대고.. 또 내 인생 어딘가에서 숨어있다가 잊을만하면 튀어나와 장난을 쳐대는 것같은작은 악마에게 화도 내고... 하여간 그런 온갖 생각을 하다가 아침이 흘러가고, 뒤늦게 깨어난 둘째 꼬맹이가 열이 없고 상태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이후에야 긴장을 풀고 약속 준비에 열중할 수 있었다.
미팅은 점심 무렵이였고, 넋놓은채 운전을 하다가 나가는 Juction을 놓쳐서 좀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약속시간보다 넉넉히 10분전에는 도착했다. 간만에 보는 이들, 새로 보는 이들, 눈을 맞추고 악수를 하고, 'baby'의 'b'도 튀어나오지 않는, 온전히 일에 관한 것만 이야기 하고, 최근의 동향에 관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렇게 순식간에 미팅을 마치고, 나오자 마자 일단 유치원에 전화해서 둘째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후에는 대학내의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커피도 같이 마셨다.
간만에 공들여 한 화장, 보통보다 10분은 더 투자해서 정성들여 말린 머리, 기분좋게 몸에 맞게 떨어지는 셔츠와 간만에 입은 체크무늬의 정장바지, 그리고 딱맞게 몸을 감싸는 자켓과 코트, 또각거리는 힐소리.. 잠깐의 시간이였지만, 꽤나 상쾌하고 기분좋은 순간들이였고, 자유스럽기까지 했다. 뭐랄까.. 살아있는 기분? 내가 나같은 순간? 내 안의 불이 반짝, 켜진 것 같은 기분?
그렇게 기분좋은 파티의 시간이 지난 후, 종은 울렸고, 난 마부없이 열심히 혼자서 차를 몰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내 세계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치원에서 날 보자마자 안기며 우는 둘째가 흘려대는 눈물 콧물에 내 자켓과 스카프가 다 젖는 걸 느끼며 마법이 깨지고 있다는 걸 알았고, 집에 도착해서 오래된 추리닝 바지와 허름한 티셔츠로 갈아입은 후, 난 다시 신데렐라로 돌아왔다. 파티의 여운 따위를 느낄 새도 없이, 둘째를 안고 내려와 얼른 저녁 준비를 했고,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남편과 첫째가 집에 들이닥쳤고, 그렇게 다시 일상은 흘러갔다. '와와' 거리고 뛰고, 웃고, 울고, 난리치는 아이 둘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잠을 재우고.. 그렇게 하루보다 더 긴듯한 3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는 내가 파티에 가긴 했었는지 가물거리기까지 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워서야 낮의 일들이 생각났다.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고, 연구 과정에 대해 다른 의견으로 갈리어 열띠게 토론하던 것도 생갔났고, 마지막에 기분좋게 악수하고 헤어지며 농담을 건네던 동료의 얼굴도 생각났고, 친구와 만나 커피를 마셨던 북적거리던 카페가 생각났고, 쨍하게 비추는 햇빛에 목걸이가 반사되어 친구 얼굴이 반짝이던 것도 생각났다. 낮을 다시 기억하자, 다시 기분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은거다. 아... 정말..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옷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힐을 신고, Common room에서 커피 한잔 뽑아서 연구실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글을 읽고 쓰던 그 시간들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그리워하는 그 시간들이 현재의 일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런 내 소리가 꽤나 사치스럽게 들릴 수 있다는 거 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쉼표없이 매일 9-5로 반복되는 (한국이라면 정확히 8-8 혹은 9-10이 일상일 수 있는..) 시간에, 조여질대로 조여지다가 더이상 조여질 수도 없이 끼익끼익하고 돌아가고만 있는 태엽같은 삶에 염증을 느낄 수도 있을거다. 세상 곳곳에서 '자신을 찾는' '스스로가 즐길 수 있는' 삶을 찾으라고 소리를 질러대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하고 싶은 시간에 하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받고 살아가는게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가 말이다..
예전에는, 뭐든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막상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믿었기에 시작했으면서) 일을 시작하고 나니, 내 생각과 다른 현실에 염증이 나기도 했다. 이게 아닌데, 내가 이럴라고 여기까지 왔나, 싶은 그런 기분... 그러면서 혼돈이 왔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 맞나. 난 정말 행복한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어떨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은 뭐지, 난 뭘 잘 하는 걸까, 내 인생의 꿈은 뭐지.. 등등... 그러다 보니 첫째 출산을 앞두고는 솔직히 좀 다행이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좀 맘놓고 (?!) 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 이제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볼 수 있겠지, 하는 그런 헛된(!) 희망도 들고.. 그래서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는 몸은 바빴지만, 그래도 머리가 쉬고 있으니 이것저것 하려고도 해봤다. 아이 젖을 먹이면서 한 손으로는 스페인어 공부도 하고, 킨들로 책도 읽고, 심지어 그림도 그리고 그랬다. 물론 그것도 아기가 별로 움직이지도 않던 아주 어릴 때 가능했고, 아이가 크면서는 생각, 자기발전은 개뿔, 내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다 보니 초조해져서, 얼른 복직을 서두르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그런 불확실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느낌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뭘하고 평생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진짜 재능은 뭘까,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등등... 주위에 아이를 낳고 나서 갑자기 인생의 방향을 바꿔 육아산업으로 뛰어든 엄마들을 보면, 나도 혹시? 하고 흔들리기도 하고, 취미삼아 만들기 시작한 아이들 옷과 장식품을 보고 주위에서 칭찬을 해대니 '그럼 혹시?'하는 생각도 들고..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지만, 전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그림도 새로 그려보고, 그러다 또 주위 반응을 보고, '지금이라도?'하는 생각도 하고.. 하여간 온갖 뻘짓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정말로 인생에 강제 정지버튼이 눌러졌다. 이제는 옆에서 뛰어다니는 첫째가 있다보니 아기 젖을 먹이면서 글 하나 읽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매일 몸은 미친 듯이 바쁘고 피곤한데, 정신은 한량한 시간이 찾아온거다. 늘 머리 쓰는 일을 해오다보니, 그런 시간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낮동안 몸은 힘든데, 정신은 황페하고, 그래서 저녁에 뭐라도 머리 쓰는 일을 하자고 하니, 몸이 피곤해서 못견뎌하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밤이 찾아오면 왠지 내가 하루하루 쓸모없어져 가는 기분이 드는거다. 이러다가는 어디 도망칠 구석도 없이 정말 크게 우울증에 잡혀먹힐것 같아서, 그 때부터 좀더 현실적으로 삶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한정된 시간내에 할 수 있는 것, 그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내게 가장 큰 만족도를 주는 것, 그리고 그들 중에 내 육아 생활 후의 내 삶을 찾을 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등등.. 아이가 둘이 되고 나니, 좋은 점이라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 지극히 현실화된다는 거다. 예전에는 막연히 내 '기분' '감' 따위로 일을 결정할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걸리는 게 많다보니 좀더 구체화된 선택표가 그려진다. 머리 속으로 현실 가능한 경우의 수들이 그려지고, 그에 따른 장단점, 그리고 그 경우의 수들에서 파생되어지는 다른 경우의 수들과 예측가능한 결과들이 줄줄이 그려진다. 그렇게 일단 선택의 폭에서 어떤 경계선이 그려지고 나니, 그렇게 내 인생을 줄곧 휘두르던 '내 인생의 방향, 꿈' 등에 대한 답이 대략 보였다. 우습게도, 워낙 육아에 치여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적다보니, 그 시간에 정말 '이것'만은 하고 싶다, 라고 갈망하게 되는 것, 그거였다.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니, 그게 원래 내가 선택했던 일인거다 허허..
집에 있는 파랑새를 두고, 온갖 고생을 하고 떠돌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오니 이 새가 그 새였네, 하는 허탈한 결말처럼.. 그리고 세상은 내가 마음먹는대로 보인다, 하는 뻔한 문구처럼.. 그렇게 글로 읽으면 뻔한 것도, 막상 내 인생이 되고 나면 왜그리 뻔해보이지 않는지... 누군가가 내 인생을 글로 써서 읽어주면, 뭐그리 흔하고 뻔한 인생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그런 서술자도 없이 그저 인생에 내던져서서 인생지도 하나 없이 이곳저곳 부딪히며 살아가다 보면, 왜 그렇게 내 인생만 불량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그래서 가능하다면, 인생계획책임자라도 찾아가서, '내 인생, 이거 정말 제대로 계획된거 맞아요? 이거 어디 고장난거 아니에요? 아니면 이렇게 실패와 고통만 거듭되는게 말이 안되잖아요!'하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을만큼...
어쨌건, 결론은 그래서 요즘 정말 미치도록 일을 하고 싶어진다는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Full-time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걸리는게 많아서, 내가 던져놓은 신발 한 짝을 들고 얼른 왕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여전히 신데렐라의 생활을 좀더 이어가고 있다는 거다. 물론 내가 타고난 조건과 운으로 단 몇시간 안에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아 내가 원하던 것을 얻어 인생을 역전시킬만한 힘을 가진 진짜 신데렐라는 아니라서, 앞으로 신발을 몇개나 집어던져야 할지도 모르겠고, 요정의 마법 지팡이보다 믿을 거라곤 나하나 밖에 없어 살짝 위태로워 보이긴 하지만.. 뭐 그래도, 내가 그렇게 재투성이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고 돌보고 있는게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운인가. 후후후.. 긍정적인 생각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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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그래서 오늘도 살짝 방황하고, 내 삶이 정작 나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고 지맘대로 굴러가고 있는 듯한 기분에 괴로워하고 있는 당신이 있다면.. 의외로 그걸 바꿀 수 있는 열쇠는 이미 당신 옷 주머니 속에 오래전부터 들어있을 수도 있을거라는 그런 뻔한 이야기... 였습니다... 후후.. 긍정적인 태도 ^^;;;
덧2. 신데렐라를 주제로 한 다양한 해석이 곁들인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이 나왔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건 Drew Barrymore가 주연한, 1998년 영화, "Ever After" 마지막에 그녀가 혼자 탈출해서 나올 때는 정말, '그래, 이거야! 언니, 멋져! 이제 왕자를 걷어차버려!(?!)" 하고 환호하게 될 정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