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중년(!)의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이 오는건가

민토리_blog 2018. 1. 31. 07:28

새해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로부터 메일이 날라왔다. 캠브리지에서 같이 박사를 했던, Lady friends 4인방 중 한명인 N에게서 온 메일이였는데... 처음에는 평범하게 신년인사로 시작했다가, 두번째 문단에 들어서서는.. 


There is something that I have to tell you. I split up with H.... 


H는 그녀의 7년차 연인이자 5년차 남편. 12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고서 이제 이별 (아니, 이혼)을 맞이했다는거다... 구구절절한 설명은 없었고, 간단히, 헤어졌다, 얼마 되지 않았다, 딱히 뭐라 문제라고 할 건 없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다... 뭐 그런 마치 일상을 얘기하는 듯한 메일... 


그녀를 처음 알게 된건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의 전 남자친구가 나와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는데.. 그녀는 기억을 잘 못하지만, 내가 그녀를 처음 본건, 그녀가 남자친구를 따라 캠브리지에 놀러왔다가, 컴퓨터룸에서 혼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공대에서 보기 힘든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드레스를 입고 있던 여자. 그게 그녀였다. 그리고 일년 정도 지나서 그녀는 그 남자친구와 헤어진 채로, 같은 학부에 박사과정을 하러 돌아왔다.. 그녀가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그녀의 전 남자친구, 내 박사 동료인 R은 길길이 날뛰며, 그녀가 캠브리지에 오기 위해 그간 나를 이용했던 것이 분명하다며 난리를 쳐댔고.. 그 증거로 그와 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 사귄 그녀의 남자친구를 댔다. 그리고 그 남자친구가 바로 그녀와 그 후 12년동안 함께한 H... 


그녀와 절대 친하게 지내지 말라던, R의 줄기찬 협박(?!)과 호소(!), 부탁(!)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가 좋았다. 새침하게 생겼으면서, 때로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날려대면서도 서글하게 웃던 그 웃음이 좋았고, 무엇보다 그녀와 둘다 운동도 좋아하고, 파티도 좋아하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게 닮아서 우린 어색한 자리에 가야할 때면 서로의 지원군으로 나섰고, 그래서 더 가까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캠브리지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내가 임신과 육아에 시달리는 동안, 그녀는 결혼을 했다. 어차피 그녀와 H, 그들의 친구들 모두 나와 내 남편의 친구들이기도 했고, 모두 다 알고 있고, 함께 어울려 놀던 사이였기 때문에, 임신 때문에 결혼식에는 못갔지만, 그래도 과정을 온라인으로 업데이트 받으며 보냈기에 그리 멀어졌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우리는 매일, 매주 보던 사이에서 몇달에 한번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로 바뀌었지만... 

그랬던 그녀의 난데없는 소식에 놀랬고, 그녀가 그 주말에 캠브리지로 온다는 소식에 당장 달려가기로 했다. 


근 4시간에 걸려 한번도 쉬지않고 운전해서 도착한 캠브리지에서 만난 그녀는, 그녀답게 이미 온갖 사람들을 모아 펍에서 와인 한 병을 앞에 두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반가우면서, 그대로인 모습에 안도가 되면서, 한편으론 미안하고 속상해졌다. 그동안 더 많이 신경쓰고 연락하지 못한 게 미안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영국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버린 그녀를 자주 보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기에.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고, 으레 그랬듯 농담을 했고, 과거 이야기를 했고... 거기에 모인, 몇년은 보지 못한 과거의 사람들과도 안부를 나누고.. 

처음 도착해서 반가운 얼굴들을 봤을 때는, 참 그대로다,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대부분이 결혼을 했고, 나처럼 아이가 둘인 사람도 있으며, 캠브리지의 비싼 집값을 얘기하고, 학교를 얘기하고...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거다. 아.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 


현재 내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은 대략 20대 후반,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 인데... 이게 참 애매한 나이대다. '청년'이라 부르기엔 좀 부끄럽고, 그렇다고 '장년' '중년'이라 부르기엔 왠지 거부감이 드는.... 아직 결혼 하지 않은 미혼의 친구들도 있고, 결혼했지만, 아직 아이가 없는 친구들도 있고, 나처럼 아이(들)이 있지만, 아직은 영유아/미취학 아동이거나... 그리고, 이제 슬슬 이혼한/하는 친구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명의 친구들이 그간 이직을 했고, 누군가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까 생각을 하고, 누군가는 임신/육아와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기도 했다. 몇번 이직을 했던 친구 한 명은 최근들어 pub을 하나 살까, 한다는 얘기를 했고, 어떤 친구는 최근에 회사 구조조정에 휩쓸려 직장을 잃었으며, 어떤 친구는 몇년간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곳에서 이제 계약이 연기 되지 않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대로 머물자니 남은 인생이 너무 길고 불투명하고.. 그렇다고 바꾸자니 막상 새로운 시작이 더이상 설레지만은 않은.. 도리어 두렵게 다가오는 그런 나이. 

20대에는 그래도 이렇게 저렿게 겉을 꾸며가며 속사정을 숨기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숨기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대화에서 속사정이 저절로 드러나거나 계산할 수 있게 된 그런 나이. 그리고 슬프게도, 그 속사정에 따라 관계가 갈라지기도 하는 그런 나이...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대로, 없으면 없는 이들끼리.. 내 이름으로 된 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출퇴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남편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전남편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휴가 때 해외로 갈 수 있는 사람과 갈 수 없는 사람, 아이 수마다 방이 따로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청소 도우미를 쓰는 사람과 쓸 수 없는 사람, 커플당 차가 한 대인 사람과 두 대인 사람.... 이런 목록은 길고 길게 늘어져서 은연 중에 우리는 머리속으로 목록을 훑어가며 tick, tick 표시를 해대고 어떨 때는 정말 속물 처럼 이런 것들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다시 캠브리지로 돌아가서...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나다는 사실에 들떠있었고, 우리는 같이 쇼핑도 하고, 새로 생긴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고 케익도 먹으며 수다를 떨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마음 속 깊이 돌 하나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더이상 12년 전의 그녀들이 아니였고.. 그녀 앞에는 난데없이 닥친 이혼으로 인한 온갖 법률문제와 재산분할 같은 문제들이 쌓여있었고, 내 앞에는 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때맞춰 아파버린) 두 꼬맹이와 집안일과 회사일의 끊임없는 저글링이 놓여있었다. 서로의 전/현 남자친구들을 비롯한 연애 관계에 대해 거의 대부분을 공개했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펍에 모여 수다를 떨어대며 상담을 해주고, 위로하고, 웃고, 부추기고, 때로 욕도 같이 하던 우리는... 더이상 지나간 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했고.. 그녀는 새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고 했지만, 그 외 더 많은 걸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철이 들어버린건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아버린건지.... 나는 결국 네일샾에서 진홍색의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는 그녀를 뒤에서 안아주고, 다시 연락한다고, 꼭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하고, 다시 4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운전해 내 아픈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린 아직 중년은 아닌데... 중년의 위기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를 잡고, 이만하면 잘 살고 있다라고 주위를 둘러볼 새로 없이 뭔가 마구 몰아치는 기분이다. 아이들을 좀 키워서 나름 독립적으로 뛰고 걷고, 똥오줌도 가리는 수준까지 왔더니, 교육, 학교 문제가 들이닥치고.. 이제 내 집 장만을 했나, 했더니 집 수리에 온갖 납부세에, 쌓이는 집안일에.. 걱정이 끊이지 않고..  이제 나름 커리어도 쌓았다 싶었는데.. 아직 내 맘대로 하기에는 짬밥이 안되고, 그렇다고 신입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기에는 이미 기대치가 높아져버렸고... 능력치를 높이려고 더 일을 하자니, 이제는 일에만 몰두하거나, 내 한몸만 신경쓰면 되었던 시기도 지났고.. 정말 중간에 끼어버린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 그래서 '중'년인가?!!)


이 시기도 분명 지나가겠지..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지금 이 시기도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외로워도, 힘들어도, 괴로워도, 또 '화팅' 한 번 하고 묵묵히 걸어갈 수 밖에.. 힘냅시다, 모든 중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