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때 쯤이였나.. 인문학과 관련된 모임 면접을 보러갔는데, 두 사람이 한 조로 입장하게 되있었다. 거기서 최근에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어보기에, 그 당시 한창 빠져있었던 강준만 교수님의 책을 읽고 있다고 말했는데, 나와 함께 면접을 봤던 다른 학생은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고 있다고 대답했다. '해리포터' 책을 서점에 갔을 때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긴 한데, 아동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때 속으로, '무슨 대학생이 해리포터야? 인문학 모임에 온 거면 인물과 사상 정돈 읽어주고 있어야 하는거 아냐?'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은근히 우쯜해했던 내 마음도...
그렇게 기억저편에 묻어져 있던 해리포터를 다시 끄집어 낸건 내가 브라이튼에 있을 때였다. 그 때는 영어공부만 한답시고 한국어로 된 책을 하나도 들고 오지 않아 책에 대한 허기증이 꽤 심해져 있었다. 그래서 브라이튼 도서관에서 영문으로 된 책을 빌려오면 제대로 끝내지도 못하고 기껏해야 처음의 몇 챕터만 보고 돌려주고... (그 때는 분명히 읽었다고 북마크까지 꼽았는데도, 다음날 책을 펼치면 처음 보는 것 같아 다시 처음부터 읽고, 또 읽고, 그러길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포기;;;;) 그러다가 거의 취미생활처럼 들리는 중고가게들의 책들을 둘러보다가 해리포터 책을 발견했다. 싼 가격도 가격이였지만, 속으로, '아이들 책인데 그래도 읽기는 쉽지 않겠어?' 하고 사서 읽게 된게 해리포터와의 기나긴 인연의 시작이였다.
해리포터 영문판의 첫장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 모르는 단어들의 공습이 다시 시작되긴 했지만, 그런 것 정도는 이겨낼만큼 흡인력이 컸다. 지금 생각해도, J. K. Rowling은 정말 글을 잘 쓴다. 아이들 책이라고 문장같은 걸 쉽게 썼다는게 아니라, 정말 감칠맛나게, 질리지도 않게 잘 쓴다. 그리고 스스로 다짐하기를 왠만한건 일단 문장 전체로 내용을 추측하고 읽다가 사전을 찾는 건 최소한으로 하자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글이 좀더 잘 읽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만에 빠져들다 시피 해서 첫 권 (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 을 다 읽고, 그 다음부터는 미친 듯이 구석구석 중고가게들을 뒤져서 두번째 책 (Harry Potter and the Chamber of Secrets), 세번째 책 (Harry Potter and the Prisoner of Azkaban)도 사서 읽었다. (원래 좋아하는 책은 사서 읽는 거 좋아함. 도서관 시간에 쫒길 필요도 없고, 보통 마음에 드는 시리즈 물은 몇번 씩 되돌려 읽어보기 때문에..). 그리고 네번째 책 (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을 읽은 건, 브라이튼에서의 시간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 그 때는 큰맘먹고 히드로 공항에서 새 책을 샀다. 그런데 읽다보니 중간에 프린트가 잘못된 게 있어, 한국에 돌아와서 출판사에 장문의 complaining 이메일을 보냈더니, 죄송하다는 정중한 이메일과 함께 새 책을 한국 주소로 보내줬다.
이미 영어로 읽기 시작했던 해리포터 시리즈라 한국어로 번역된건 다시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다섯번째 책 (Harry Potter and the Order of Phoenix)을 만난건 내가 캠브리지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후였다. 어딜 가든 일단 도서관부터 들리는게 내 나름의 습관이라 들려서 등록한 뒤 처음으로 빌려 읽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섯번째 새 책 (Harry Potter and the Half-Blood Prince)이 나온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예약을 하고 그랬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할만큼 심장이 떨리기에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났고, 다섯번째 책부터 시작된 우울하고 음침한 분위기에 좀 마음이 지친지라 그냥 기다렸다가 새 책이 나온 후 서점에 가서 읽기 시작했다. 지금 캠브리지 센터에 TKMaxx가 있던 곳에 원래는 Borders 서점이 있었다. 2층에는 스타벅스가 있고.. Borders 서점에는 앉을 만한 의자도 많아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기 전이나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곧잘 들어가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거기서 여섯번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첫번째 쳅터도 못 끝내고 그만뒀다. '다죽네, 다죽어' 하면서 속으로 짜증을 내며 책을 덮었던게 생각난다;;;
그 후로 해리포터는 다시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최근에 다시 해리포터를 만났다;; 전에 TV에서 해리포터 마지막 시리즈들을 보여줬는데, 그 때 문득 해리포터 시리즈 완결이 나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서관에 간김에 마지막 권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을 빌려왔다. 그리고 다시 빠져들었다;;; 마지막권을 다시 중독된 것처럼 밤낮으로 틈틈히 읽어대다가, 다 읽은 후에는 읽다가 때려친 여섯번째 책도 빌려와서 다 읽고, 심지어 다섯번째, 네번째 책도 다시 빌려와서 또 읽었다;;; 남편이 "You are getting obsessed with Harry Potter"하고 핀잔을 줄 정도로;;; ㅎㅎ
원래 뭐든 빠지면 거의 끝장을 볼 때까지 빠지는 편이기 때문에, 예상했던 내 행동패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해리포터 책을 읽고 나서 감탄했다. 10년동안 일곱권의 책을 냈는데, 어찌나 치밀하게 짜여지고 잘 써놨는지, J K Rowling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보통 시리즈물 같은 경우, 아예 서로의 연계성이 별로 없거나, 연결되더라도 나중에는 긴장감이 떨어지거나, '이건 뭐야?'하는 생각이 들만큼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는데... 해리포터는 정말 7권 내내 긴장감이 있고 구석구석 힌트도 던져져 있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힌트들이 다 들어나고 큰 그림이 나오면서 거의 카타르시스적(?!)인 만족도 선사하기 때문에 다시 책을 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 출판사에서 돈받거나 한거 아니에요 ㅎㅎ;;; )
어쨌건 그렇게 밀도높은 해리포터 시간을 가진 후에야 난 '아, 다 봤다'라는 만족스런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혹시 어딘가 중고가게에서 해리포터의 마지막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면 주저않고 사겠지만 ㅋ 그리고 해리포터 시리즈를 본다고 속으로 살짝 비웃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부끄럽다. 어떤 책이든 읽어보지 않고서 그 수준을 가늠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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