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죽음에 대한 기억들

민토리_blog 2014. 11. 17. 21:01

아버지는 2년 정도 암으로 투병하시다가 3년전에 돌아가셨다. 그 2년동안 영국에서 부재중 전화가 오기만 해도, 한국 국가번호가 찍힌 전화가 걸려오기만 해도 가슴이 내려앉는 긴장감으로 살았었는데... 어느날 난데없이 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 그리고 계속 날더러 "어디고?"하고 물으시길래 전화를 끊고 울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그 주말에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비행기표를 끊고, 한국에 도착한지 이틀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들 지인들과 친척들, 사업상 아시는 분들께 연락을 한다고 바쁜데, 영국에 오래 나가있어 이미 인간관계가 대략 소수정예로 정리된데다가, 급하게 들어와서 내가 한국에 있는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은 나같은 경우는 그냥 장례식장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지만, 한 사람이 죽었는데 내쫒기듯 침대를 장례식장으로 보내버리고, 내 아버지의 찬 이마를 맞대한지 30분도 지나지 않은거 같은데 우린 쇼핑나온 사람마냥 카탈로그를 보면서 꽃장식 종류나 영정사진 사이즈따위를 선택해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또 하루를 살아갈 생계의 수단이라니.....

어쨌건 아버지의 죽음에는 어떤 이들이 '성공적이다'라고 부를만큼 많은 이들의 조문이 있었고, 밖에는 어디서 보냈다는 리본을 단 화단들이 가득 줄 서 있었다. 누군가는 내 아버지의 죽음을 핑계삼아 공짜 술을 마시며 자신의 인생한탄을 시작했고, 내 아버지 살아 생전에는 보기도 힘들던 친척들은 이참에 가족모임을 하려고 왔는듯, 요즘 어찌 지내냐 일본이 좋다던데 우리 내년에 같이 놀러갈까 등의 잡담을 자기들끼리 하고 있었고, 늘 '형 탓이에요'하며 내 아버지를 들들 볶아대면서 술주정을 부리다가 자취를 감추었던 작은 아버지는 이번에 나타나 우리들에게 자기가 하고있는 보험에 가입을 해달라며 수작을 부렸다. 몇년동안 보지도 못했던 사촌 언니 하나는 손님들 상을 치우고 있는 내게 와서 영국에 산다며, 좋겠다~, 남자친구가 외국인이라던데, 좋겠다~, 스페인 사람들 정열적이라던데 좋겠다~, 같은 도저히 상황과 맞지 않아 우스꽝스럽기 조차한 소리들을 지끌여댔다.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가까운 두 사람의 죽음을 더 본 적이 있는데, 한사람은 내 첫 남자친구였다. 헤어진지 3년 후에 난데없이 서로 알던 친구를 통해 연락이 왔는데, 새로운 패션이라며 머리를 다 밀고 나타났었다. 사귀기 전에 친구였던 사이였고, 농담인듯 진담인듯 "너보다 진짜 착한 애 만난다"라고 했고, 중간에서 다시 만남을 주선해준 친구 역시 그의 여자친구 존재와 정말 친구로 궁금해서 연락하는 거라며 확신을 주길래 다시 드문드문 연락하고 중간의 친구와 다같이 만나 놀기도 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어느 저녁 또 다같이 만나 놀고 헤어지는 길에 뜬금없이 자길 집에 바래다 달라기에 너 이럼 네 여자친구한테 욕먹어, 하고 웃어넘기려는데, 그 표정이 왠지 심각했더랬다. 그래서 함께 걷게된 그 길에서, 그것도 집에 다와서 근처를 한바퀴만 더 돌자고 말한 뒤, 그 마지막 길에서 내 첫 남자친구였던 그는 내게 자신이 직장암 말기임을 밝혔다. 망할 넘... 뭐랄까.. 그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그동안 의문스럽던게 확 풀리기도 하면서, 그동안 티비에서나 듣던 백혈병과 더불어 불치병의 대명사로 꼽히던 암이 내 삶에 현실로 나타났다는게 안믿기기도 하고 (이때가 처음이였지, 내 아버지도, 아버지 이후 보게된 3번의 죽음 모두 암때문이였다), 초기도 아닌 말기란 말이 당황스럽고.. 뭔말을 해야겠는지 모르는 와중에 눈물만 나왔었다...

그날 헤어진 이후 돌아오는 길부터 그날 밤까지 꼬박 울며 시간을 보냈는데 .. 다음날 아침에 들은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았고, 내가 뭘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만나서 어디 놀러라도 가자 하기엔 자기 여자친구가 있으니 그러기도 우습고, 나로선 그냥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중간의 친구를 통해 그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받으며 안도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와서 버섯전골을 먹으러 가자고 하길래, 그날 일이 많아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내일 가자, 했는데 연락이 안되더니 3일 후쯤엔가 중간 친구가 연락을 해서는 그가 혼수상태라고 알려줬다. 

침대마다 칸막이가 되어있고 들어가기 전에 소독복과 장갑,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이상한 병실 앞에 처음뵙는 그의 어머니와 중간 친구와 줄을 서있다가 잠깐 그를 볼 수 있었는데..... 암이라는게 그런 형태로 사람을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그의 어머니가 왜 들어오기 전에 꼭 봐야하냐며 만류하셨는지 알 것 같았다. 가족 외 사람들은 면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서 중간 친구와 다음주에 다시 오자, 약속을 하고 헤어졌는데 바로 그 주 주말에 연락이 와서는 새벽에 숨을 놓았다고 했다. 

장례식장은 정말... 묘한 곳이다. 아버지 이전에 처음으로 나 혼자 가게된 장례식장이였는데, 예식장마냥 밖에 이름이 반짝이며 어디 방에 있다는 걸 알리는 것도 그렇고.. 그토록 분주하고, 화단들이 줄서 반기는 것도 그렇고.... 

그의 여자친구가 가족들을 도와 분주히 일하고 있는 장례식장에서, 그의 학교 친구도, 뭣도 아닌 내가 있다는 자체가 이상했고, 막상 접한 그의 영정사진에서 그는 아주 환하게 웃고 있어 더 눈물만 났던.. 그렇지만 대놓고 울 수가 없어 여자 화장실에서, 밖에서 울기만 하다가 돌아왔던 그날.. 

여자 화장실에서 마주친 그의 어머니는 나를 알고 계시다고 했고, 그가 내게 준 천마리의 거북이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두통에 시달리며 접어 보내준 학 천마리가 아직 집에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의 마지막 모습은 잊고 좋은 모습만 기억하라 하셨다. 

......

그리고 벚꽃축제가 한창이던 진해로 버스를 타고 가서 마주해야했던 미이라마냥 누워 있던 시신 하나. 공교롭게도 부활절이라 지나치는 교회마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장식된 삶은 계란 따윌 나눠주기도 했는데.. 예수님이 부활한 그 날에 그사람은 그렇게 죽었구나 싶어 기분이 이상했고...

몇년만에 만나서 안부를 대강 묻고, 결혼했다는 소식에 가보진 못했지만 축하한다고 했는데, 신혼 생활 1년도 못넘기고 갑자기 암으로 죽어버린 그녀. 

분명 2주전에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고 남은 반나절 얘기도 하고 럭비까지 같이 봤는데, 나중에 그분의 부인께서 별세소식을 알려주셔서 장례식장까진 못가고 집에서 열린 조촐한 행사에 참석했었던 영국 노신사분의 죽음. 다들 그래도 까만 옷을 입고 좀 엄숙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일반 하우스파티와 다를바 없이 다만 다른거라면 그분 부인께서 "Thank you for coming. He will aopreciat it" 하는 말씀을 하신 정도?라 좀 놀랬었던 경험.

마지막으로 남편의 이모님을 만났을 때는 누가 말하기도 전에 암이라는 녀석의 존재를 그녀에게서 발견하고 혼자 마음의 준비를 했더랬다. 

지금 시댁은 내가 한번도 뵌적 없는 고모 할머니의 병세로 긴장상태다.. 

아주 흔한 말인데... 죽음이 삶과 그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눈치채기가 쉽지 않다. 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난 며칠동안 환청에 시달렸고, 입술이 다 터지고 잇몸이 아파 아무것도 먹지 못한체 며칠을 보냈고, 영국에 돌아와서도 매일 자기전에 울고, 온몸이 두드러기로 뒤덮히는 등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지만, 난 여전히 살아있었고, 임신을 하고 나서는 부디 내 아이들이 죽음이라는 녀석에게 존재조차 들키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내 아이들을 끌어안고 우리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또 언제 어느순간에 어떤 형태의 죽음을 내가 마주 대할지는 몰라도, 그 전까지는 그저 매일 이렇게 일상이 이어짐에 감사하고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