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영국인과 친해지는 단계

민토리_blog 2014. 2. 14. 06:30

K가 최근 우을증 진단을 받았다며 우리에게 알렸다.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그녀를 보기가 어려워 우린 그대신 서로 만날 때마다 그녀의 소식을 누가 혹시 더 들었는지 궁금해 했고, 그녀를 집밖으로 불러내기 위해 맘먹고 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우울증에 대해서는 얘길 꺼내지 않고 그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혹시 생각이 있으면 금요일에 아기들을 데리고 댄스클래스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녀는 무척 고마워 했고, 우린 그러자며 몇일전부터 계획을 했더랬다. 그랬는데 그녀에게 오늘 저녁 다시 연락이 왔다. 그녀의 남편이 새로운 약 처방을 받게 되었는데, 그 약이 독해서 아무래도 자기가 옆에 있어줘야 할 거 같다고.. 그래서 알게된 건데, 그녀의 남편은 정신분열증을 알고 있다고 했다. 보통은 괜찮지만, 한번 발작이 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그제야 왜 그녀가 그토록 집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왜 어디 나올 때마다 남편을 동반하는지, 왜 남편을 집에 몇시간도 혼자 두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활달한 그녀가 왜 지금은 우울증 처방을 받게 되었는지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우리'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아기를 낳고 나서 만난 아기 엄마들로, 이제는 '친구'라고 서로를 부를 수 있을정도로 왠만한 얘기들을 공유하는 영국인들이다. 1년전만 해도 이 외딴 마을에서 도저히 인간관계를 넓힐 수 없을 것 같아 이사를 고려할 정도였는데, 거기에 비하면 꽤나 상황이 나아진 편이다. 어쨌건 그동안의 인간관계를 새삼 돌아보다가 한번 정리해서 적어봐도 괜찮겠다 싶어 하는 이야기 - 영국인과 친해지는 단계들. 


단계 1. 그저 아는 사이


오다가다 눈인사라도 하며 나름 아는 척 해주는 사이가 다 여기 속한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너무 자주 들러 얼굴을 익히게 된 까페 종업원/주인, 도서관의 사서, 분명 내가 사는 거리 어느 곳에 살고 있는 이웃, 버스정류장에서 늘 마주치는 그 여자, 대학 주차장을 담당하고 있는 관리인, 어느 학부 소속인진 몰라도 휴계실에서 커피를 탈 때마다 종종 보게되는 그 사람 등등... 이 사람들과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차이점이라면, 서로를 인식한다는 거다. 만났을 때 눈인사를 하고, 어떨 땐 날씨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오늘 아침 차가 너무 막히더라는 얘기도 하며,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걱정이란 얘기도 하고, 오늘은 유달리 단게 땡긴다는 소소한 이야기도 하는 관계. 그렇지만, 서로의 이름은 알지 못하고, 뭘 하는 사람인지, 뭘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디에 사는지, 그런 개인적인 정보는 전혀 모르는 그런 관계. 


단계 2. 개인적인 정보를 주고 받는 사이


의외로 단계 1에서 단계 2까지 넘어오는 건 꽤나 시간이 걸린다. 특히 영국인들과는 단계 1이 지독히도 길게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왠만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단계 1에 머물곤 한다. 단계 1에서 단계 2로 넘어가게 되는 가장 간단한 계기는 그 사람들과 다른 종류의 관계가 하나 더 생겼을 때다. 예를 들면, 그저 얼굴만 알고 간단한 얘기만 주고받던 도서관의 사서가 알고봤더니 나와 친한 이웃의 직장동료였다. 그 때부터 우린 그 '공통분모' 하나때문에 서로의 이름을 묻고, 이번에는 오직 초대받은 이들만 참가할 수 있다는, 웨일즈 정부 주최의 Book Fair에도 더불어 초대받을 수 있게 되었다. 휴계실에서만 마주치던 그 사람은 다른 이의 Farewell party에서 다시 마주침으로서 서로의 이름과 소속, 사는 동네까지 알 수 있게 되었고, 버스정류장에서만 종종 보던 그녀는 몇달 후에 갓 태어난 아기를 안고 내가 다니는 베이비클럽에 오게 됨에 따라 정확히 동네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 그 아기 외에 다른 두 아이가 더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공통분모'가 생기면 '익명'이던 단계 1의 사람들은 단계 2로 넘어가 내 머릿속에 이름별로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단계 1에서 넘어가지 않더라도, 직장동료들, 내 남편/친구의 친구들, 친구의 연인/파트너들, 가까운 이웃들은 이쯤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단계 3. 개인 연락처를 주고 받는 사이


개인 정보 - 이름, 직업, 대략의 사는 곳, 가족 관계 등 -를 안다고 해서 아직 친하다고 하긴 좀 이르다. 여전히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긴 좀 그렇다는 거다. 단계 2에서 더 관계가 진행되고, 서로에게 호감이 생기고,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고.. 그러고 나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게 된다. 여기까지 또 시간이 걸린다. 왜냐면 연락처를 모르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 질 수 있는건 얼마큼 함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느냐에 따른데.. 직장동료라면, 얼마나 회사내에서 자주 마주치느냐, 얼마나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드느냐, 그리고 그 시간동안 서로에 대한 호감도를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에 따라 그 관계 진행도가 결정되는 거다. 이렇게 어찌어찌 서로 자주 만나게 되고, 상호간에 호감도가 좀 높아지면 자연스레 서로의 연락처를 물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영국인들의 다소 소심한 성격 탓에 기다리기 좀 지루한 감이 있으면, 먼저 물어도 된다. 무턱대고 묻는게 좀 그러면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계기를 찾는 거다. 아기 엄마들 같은 경우, 이런 이런 베이비 클럽이 있다더라, 함께 가보겠느냐, 직장동료라면 이번에 새로 생긴 음식점 괜찮다던데 점심 같이 먹으러 가지 않을래, 뭐 그런식으로 '혹시 모르니 네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하는 거다. 그렇게 한번 연락처를 트게 되면, SNS까지 줄줄이 트게 되기도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건, 서로를 만나면서 하는 대화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읽어내야 한다는 거다. 하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 저절로 궁금해져서 묻게되고, 상대방도 내게 호감이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서 자신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니, 그런걸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더 친해지는 계기로 삼는거다. 


단계 4. 서로 부탁을 주고 받는 사이


서로의 연락처도 알고, 취향도 알고, 대강의 성격도 파악하게 되고, 주말 스케쥴도 알게 되며, 그 사람의 일상까지 대충 알게 된 후, 더 친해지는 단계는 서로 부탁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영국인들은 '부탁'에 좀 민감한 편이다. 폐를 끼치기 싫어해서 내가 좋은 마음으로 제안해도 왠만한 경우, "Oh, thank you so much, it's very kind of you, but I should be all right. I can ask my mum/sister/brother/friend, ....."등의 정중한 거절을 듣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I will definitely ask you next time if I really need it" 등으로 다음번을 기약하지만 그 사람이 내게 다시 부탁을 할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만약 상대방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내게 부탁을 하는 경우, 왠지 상대방은 내게 '빚졌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늘 무한한 'Thank you'를 듣게 되고, 다음번에 봤을 때 내게 더 친근히 구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나중에 내게 무슨 일이 있을 때도 부탁하기가 좀 쉬워지기도 한다 - 아니, 부탁하기 전에 대부분 상대방이 먼저 제안하거나, "If you need any help, please let me know"라며 말해준다. 

그러니 누군가와 더 친해지고 싶다면, 그 사람이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먼저 손을 내밀어 주고,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거나, 행여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을 요청할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는 표현을 질리도록 해주고, 작은 초코렛 선물이라도 건네는게 관계를 돈독히 하는 지름길이다. 

팁. 귀찮아도 'Thank you' 카드 쓰는 걸 미루지 말자! 그리고 작은 초코렛 선물은 누구에게든 환영받는다! 


단계 5. 서로 힘든 얘기, 고민도 주고 받는 사이


이 정도 되면 사실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괜찮다. 영국인들은 왠만해선 속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매일 만나서 'how are you doing?'이라고 물으면 대부분 힘들고 피곤하고 죽을 거 같아도 'Yeah, I'm all right, not too bad, just tired bit' 정도로만 대답할 만큼 우울하고 힘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이들이 나와 차 한잔, 커피 한 잔을 하며 가족사, 개인사 등을 꺼낸다는 건 그 사람에게 내가 믿을 만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괜찮다. 물론 여기서 서로 '친구'라고 느껴지려면 상대방이 맘을 여는 그 레벨만큼 나도 열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내 깊은 속내를 드러내서 힘든 얘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별로 할 말을 못찾고, 좀 불편한 기색으로 "I'm sorry to hear that", "I can't imagine", "That must be hard" 등의 말대꾸만 하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나를 가까이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사실 내게는 이 단계에서 다시 관계가 재정비되는 경우도 꽤 많았다. 정말 친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속마음을 열었을 때 왠지 벽에 부딪친 것 같은 느낌.. 그럴 경우, 다시 관계는 그저 친한 단계 4나 단계 3이 되어버린달까... 


단계 6. 서로의 약점으로 농담을 할 수 있는 사이 


나와 정말 친한 친구들 몇명 사이에서는 좀 심하다 싶은 농담도 오고 간다.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없이 튀어나오고, 성격이나 외모를 빗댄 농담도 오고 가지만, 서로 거기에 대해서 불쾌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만큼 서로를 알고 친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인의 주 특기인 'Sarcastic'한 코멘트가 정말 재미있게 받아들여지고, 나 역시 그런 농담을 서슴없이 할 수 있게 되는 단계. 내가 영국인에 대한 농담을 해도 맞받아치는 관계. 내 경험으로는 그게 영국인과 친해질 수 있는 최고의 단계가 아닐까 싶다. 


..... 

이렇게 적고 나니, 영국인과 친해지는 단계라는게, 어찌 보면 연인들이 서로 처음 만나 알아가면서 서서히 가까워 지는 단계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영국인이 아니라 어느 사람관계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다 비슷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만, 영국인의 특성상 속마음을 잘 안열고, 상호신뢰를 쌓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는 까닭에, '영국인과는 친해지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오는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보자면, 영국인과 가까워지려면 일단 '시간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꾸준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무조건 영국인이라고 가까워지라는 게 아니라, 나와 통하는 상대라는 전제가 깔리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