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와 살아남기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민토리_blog 2013. 8. 20. 06:00
요즘 아기에게 자기 전에 동화책을 하나씩 읽어주고 있는데... 읽다보면 뭔가 허전한 맘을 감출 수가 없다. 뭐랄까.. 뭔가 더 있을 거 같은데,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느낌? 특히 모든 이야기들의 마지막을 보자면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다.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걸까.. 내 경험으로는 결혼하면 그 때부터 새로운 이야기 시작이고, 도깨비 방망이로 부자가 되었으면 그 때부터 온갖 문제가 시작될 거 같은데 말이다... 

지난 2주간 친구네 부부가 그들의 2살된 아기와 함께 머물다가 갔다. 정확히는 남편의 친구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딸이 오는 거지만.. 남편의 고교동창인 친한 친구들 중에 결혼을 해서 아기까지 있는 건 그들밖에 없었으므로, 결혼과 육아라는 주제 하나만으로 그의 아내인 K와 난 급격히 친해진 상태였다. 그의 고향에 갈때마다 남편들이 없어도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났고, 그렇게 얘기할 때마다 나와 꽤 비슷한 면이 많았던 까닭에, 사실 난 그들의 이번 방문을 꽤 설레이며 기다렸다. 아기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곳들을 알아보고, 그녀가 좋아할 법한 곳들도 알아보고... 난 2주동안 그녀와 함께 내가 지내는 곳을 보여주고, 여기서 만나 친해진 다른 엄마 친구들도 소개시켜주고, 같이 아기들을 데리고 놀러다닐 생각에 좀 들떠 있었는데... 
정작 2주간 나와 아기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시간을 보낸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 즉 남편의 친구인 A였다. 얼마나 둘이 돌아다녔는지, 어느 날 같이 아기들을 데리고 산책을 갔다가 지나가던 다른 노부인이 우릴 커플로 착각하고 인사를 몇번 건네기도 했다.. 그동안 그녀는 무얼했냐면... 집에서 쉬었다. 우리가 아기들을 데리고 나가있는 동안, 그녀는 그녀의 방에서 잠을 청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휴식을 만낏했다. 

하긴... 그들은 휴가차 온 것이니, 그녀가 쉬겠다는데 뭐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러는 동안, 난 두 아이의 식사를 준비하고, 그의 남편이 행여 어색해 하지 않도록 매일 아기들과 놀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짜고.. 그녀가 잔다는데 방해될까봐 비오는 날에도 일부러 아기와 산책을 가고...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면 그제야 남편의 친구는 아기를 부인에게 맡기고 남편과 맥주 한 잔을 하며 수다를 즐겼다. 그러는 사이, 난 여전히 아기와 놀아주고, 내 아기를 재운 후에는 그녀도 아기를 재우러 올라가서는 내려 오지 않았기 때문에 저녁 시간 역시 남편과 그의 친구 A,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종종 얘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남편이 농담삼아 한 얘기가 떠올랐다. 친구들 사이에 그녀의 별명이 '백설공주'라는 것이었다. 그 때는 얼굴이 유독 하애서 그런가 하며 넘어갔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참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축구장만한 정원이 있는 대저택에서 자랐다는 그녀. 왠만한 놀이터는 저리가라 할 만큼 정원과 집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작 밖에 나가 동네 아이들과 어울릴 일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계모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이 지나쳤던 까닭에 자신의 하나뿐인 딸인 그녀에게도 퍽 모질게 굴었다고 했다. 그 모든 간섭과 높은 기대치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는 전공을 택해 대학을 핑계로 집을 나왔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못해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로 도망을 치는데... (두둥!) 거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작은(?!) 학생 도미토리에서 옹기종기 사람들과 부대껴 지내다가 집에서 결혼하라고 보내온 약혼자의 득달에 실신할 무렵, 역시 공부하러 벨파스트로 유학온 현재의 남편 A를 만나 새삶(?!)을 찾게 된다. 

동화처럼 여기서 '그렇게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마무리 되면 좋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신경줄을 곤두세우고, 그녀의 어머니는 딸에게 하던 것 마냥 손녀에게도 그다지 살갑지는 않은 모양이였다. 요리나 집안일 같은 것도 못하는 바람에 그녀의 시어머니가 종종 찾아와 청소를 해주는 것에 대해 차라리 잘됬다고 말하고, 2년의 육아기간동안 기운이 다 빠져서 지금도 조금만 피곤하면 두통이 찾아와 뭘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나름 왕자였던 A는 틈틈히 시간이 날 때마다 요리를 하고, 아기를 돌봐준다. 

그런 백설공주 같은 그녀에 비하면, 16년간 줄곧 단칸방에서 온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나같은 경우는 차라리 신데렐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나 역시 왕자만나 결혼해서 아기낳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고 마무리 지으면 좋겠지만... 고생하던 시절의 버릇 개 못준다고, 혼자 궂은 일은 다 맡아 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을 하는게 일상이다... 

그래서 똑같이 왕자(라고 치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백설공주와 신데렐라는 그렇게 다른 삶을 사는 거다. 8시간의 잠이 모자라 3시간의 낮잠을 더 자야만 하는 백설공주와, 5시간의 잠을 자고도 하루를 뻑뻑하게 일하며 보내는 신데렐라 같은 삶... 

그녀가 굳이 부럽다거나 한 건 아니였지만 (솔직히 새벽 5시부터 깨서 아기들 밖에 데리고 나가 하루종일 놀아주고 왔을 때, 낮잠 자고 내려와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읽고 있는 그녀를 보곤 부러웠다..), 좀 신선한 충격이었다. 저렇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이러니 내가 동화책 끝부분을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거다. 어쨌건, 그런 엉뚱한 타령은 그만하고, 그들은 이제 돌아갔고, 내겐 내 일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단 몸과 마음의 피로부터 풀어야 겠다. 에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