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책읽기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익명성의 무게

민토리_blog 2020. 5. 9. 23:23

올해 초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휴교령이 내리기 전) 학교에 학부모 참가 수업이 있으니 가능한 많은 부모님들의 참여를 바란다는 학교 공문을 받은 적이 있다. 주중에 그것도 애매한 오전 10시 혹은 오후 2시에 참여 수업이라니, 직장 다니는 맞벌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둘째네 학년 한 반의 첫 참여 수업 사진이 학교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걸 보고 마음을 바꿨다. 보아하니 그냥 일반 수업을 학부모가 교실 뒤편에 서서 지켜보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일대 일로 뭘 하는 수업이었다. 주르륵 올라온 사진을 보니, 여기에 참가하지 않으면 내 아이는 거의 혼자 교실 어딘가에 남아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진땀이 나서 결국 회사 일정을 조절하고 참가신청서를 보냈다. 

 

그리고 첫째 아이 참가수업날. 아이들의 짧은 발표가 있었고, 역시 예상했던 것처럼 부모와 아이가 짝이 되어 만들기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웨일스 용을 만들라고 종이와 패턴, 가위, 펜, 뭐 이런 게 주어져서 패턴대로 종이를 잘라 아이가 그걸 꾸미고 있는 동안 심심해져서 아이가 좋아하는 마인크래프트 게임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렇게 하나 둘 만들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주위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거기에 내 아이는 신이 나서,  온갖 캐릭터 등을 주문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한 아이가 물었다. 'Are you a Youtuber?' 그래서 아니라고 하니, 아주 의아한 듯 보더니 'Why not?'하고 다시 물었다. 마치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듯. 

 

원래 게임을 좋아하는 탓에 요즘 첫째가 빠져있는 Minecraft 게임을 아이와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와 같이가 아니라도 나 혼자 게임을 하고 그러다 보니 같이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도 빌려서 같이 읽고 정보 공유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게임을 하는 첫째 아이의 친구들과 비슷한 주제로 대화도 하게 되고, 그래서 그 부모들로부터도 관련 질문을 받게 된다. 그러다 또 친한 엄마 한 명이 우스개 소리로 그런 소릴 했다. 이런 주제로 유튜브 채널 같은걸 만들면 괜찮을 거라고.

 

요즘은 뭘 해도 소셜미디어가 대세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황에서는 뭐든 온라인으로 되는 게 인기다. 운동 비디오, 아이들 요가 비디오, 책 읽어주는 채널, 스펠링 공부시키는 채널 등등 뭐 많다. 댄스 교실을 운영하는 친구도 이 틈을 타서 개인 채널을 오픈했다. 그리고 온라인으로 수업이 올라오는 Google Classroom에는 선생님들의 다양한 영상 수업 자료들을 볼 수 있다. 아마 내가 대학에 계속 있었다면 나 역시 어떻게든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나는 대학을 떠나길 잘했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다.... 


나는 '익명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기에 사생활 보호에도 꽤나 민감해서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상태에서도 공과 사의 구분을 정확히 해서 경계를 그으려는 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도 웬만하면 내가 정확히 어디쯤에 사는지 알리려 하지 않는다던지, 예전에 대학에서 일할 때는 거기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살았는데, 대학에 가는 일이 아닌 이상 주말이든 방학 때든 가족들과 그 근처로는 절대 가지 않기도 했다. 당연히 학생들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는 경우도 없고, 졸업하지 않은 학생들의 Linkedin 요청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온라인상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열린 리뷰 같은 것은 절대 남기지 않고 목적에 따라 여러 개의 이메일 주소를 나눠서 쓴다. 

 

그래서 사실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도 갈등이 꽤 컸는데... 사진 같은 걸 막 공개하고 싶다가도, 그런 이유들로 그만둘 때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블로그를 하고 있다는 걸 내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다;;; 남편은 알지만 어차피 한국말을 모르니까 ㅎㅎㅎ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글을 쓰는 것에 치우치는 블로그가 되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브런치까지 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개인적으로 꽤나 큰 발전이다. 그리고 나는 그림도 종종 그리고, 아이들 옷도 만드는 편인데 그걸 온라인상에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습관적으로 그림에 내 이름을 적어놓기 때문이고, 역시 사진이 첨부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 습성(!)을 아는 남편은 내가 유난스럽다 라고 표현했고, 나 역시 내가 유달리 민감하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묻어두고 있었는데, 이번에 밀란 쿤데라의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읽다가 한 구절이 확 하고 마음에 들어왔다. 

 

"For Sabina, living in truth, lying neither to ourselves nor to others, was possible only away from the public: the moment someone keeps an eye on what we do, we involuntarily make allowances for that eye, and nothing we do is truthful. Having a public, keeping a public in mind, means living in lies.... A man who loses his privacy loses everything, Sabina thought" (p.109)  

 

즉, 스스로에게 진실된 삶을 사는 건 남에게 노출되지 않는 사적인 공간에서만 가능하다, 뭐 그런 이야기인데, 마지막 문장, 사생활을 잃은 사람은 모든 걸 잃는 것과 같다, 라는 말이 확 와 닿았다. 글 중에서 사비나가 사생활 보장이 잘 되지 않던 Bohemia 출신인걸 감안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건 없었다. 한국 역시 사생활 보장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고, 나 역시 단칸방에서 다섯 가족이 부대끼며 사생활 따위는 작은 서랍 한 구석도 허락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거기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내 일상이 그대로 누려질 자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뜻대로 할 수 있는 자유, 그런 걸 익명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지키려고 하고 있는 건가... 


당연히 이 책은 익명성이라는 주제로 쓰인 글은 아니다. 처음 읽게 된 건 이 블로그에 답글을 달아주신 분 때문에 흥미가 생겨서였고, 책 제목은 수차례 들었기 때문에 밀린 숙제 해치우는 기분으로 읽은 것도 있다. 뭔가 아주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주제에 잠시 당황했고, 중간중간 후려치듯 들어오는 말들에 공감했고, 뒤로 갈수록 나타나는 철학의 흔적들에 잠시 길을 잃기도 했다. 결론은 그 제목답게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거지만, 아마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주제를 던져주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