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이야기
가끔 내가 블로그를 쓰고 있는 걸 볼 때면, 남편은 "Are you writing about me?"하고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묻는다. 그럼 대부분 나는 간략명료하게 "No"하고 대답하지만;; 남편은 보통 A4 한장은 족히 넘을 분량의 글을 자기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타닥타닥 두드리며 쓰고 있는 나를 보고 종종 신기해 한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이 궁금하다고, 알고 싶다고 하지만, (그럼 한글 공부를 좀 하던가 -_-) 물론 남편을 위해 번역 따위는 해주지 않는다 ㅎㅎ
보통 해외생활이나 남편이 외국인인 경우, 남편과의 이야기가 주가 되거나, 아니더라도 종종 주/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 글에서는 대사 몇 마디 정도의 단역으로 출연할지언정 잘 등장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음...
사실 남편 이전에 영국인 남자친구와 처음 연애할 때는 새롭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고, 전 남친이 달달한 성격이기도 했던 까닭에 막 쏟아내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었다. 서양남자들은 로맨틱하다던데, 정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아침에 남겨놓던 작은 쪽지들, 주말 전에 손수 만든 카드로 저녁 초대를 보내고, 나만을 위한 작은 이벤트도 해주고, 정말 내 취향을 저격하는 듯한 선물들, 런던에서 했던 달콤한 데이트와 런던아이에서 봤던 야경.... 원래 내 이상형이 약간 보이쉬한 귀여운 얼굴에 근육있는 몸매의 사기캐인데.. 그는 내가 만나봤던 모든 남자들을 통틀어 가장 이상형에 근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와의 달달한 에피소드가 있고 나면, 간질간질한 느낌에 막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사실 그 때 네이버에 블로그를 만들기도 했었다. (글 하나 쓰다가 오글한 마음에 때려치워버렸지만...;;;;) 그런데 그 관계가 끝나고... 그 달달한 마음도 좀 식어버렸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사람관계가, 마음이, 연애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알아버렸고... 그러고 나니,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난 것 마냥 들뜬게 좀 가라앉았다. 만약 그 때 남자친구와 그 달달한 관계가 깨지지 않고 잘 이어져서 결혼까지 이어졌다면, 나 역시 내 달달한 영국인 남편과의 에피소드를 지금 쓰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랬더라고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애초에 달달한 글을 쓸만한 재주가 없기 때문에;;;)
그에 비해 남편은.. 귀엽다기 보다 남자다운 얼굴이고,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라기 보다, 마른 근육형이다. 그가 대학에 왔을 때 다른 친구들이 그를 '본드'라고 농담삼아 불렀는데, 잘생김을 떠나서 일단 내 이상형과는 동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이성으로서의 관심도는 사실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는 말이 별로 없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별로 관심도, 흥미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 그와 친해지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매운 것을 잘 못먹었고, 무채색의 옷을 입었고, 친구들과의 파티에 꼭 정시에 맞춰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등장하면서 와인을 사오는 그런 남자였다. Secret Santa를 할 때는 그의 선물만 깔끔한 포장에 리본까지 달려있었기 때문에 우린 모두 말하지 않아도 저 선물이 누구 건지 안다고 놀려댈 정도였고. 점심 먹은 후 꼭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걸 제외하면, 옅은 갈색의 머리나 푸른 눈동자, 원칙 중시의 성격 등 어느 것 하나 그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말해주는게 거의 없다. 마치 조상 중 독일인이나 북유럽 사람이 있어서 유전자를 몰빵 맞은 것처럼;;;; (실제로 부모님이나 형제와 비교해봐도 그다지 닮은 모습은 잘 안보인다. 심지어 어렸을 때는 완전 금발에 예쁘장한 얼굴이라 여자애로 오해받거나, 친자가 아닌 걸로 오해받기도 했다고;;;)
나는 당시 학생회 활동을 포함한 여러개 동아리 활동으로 사교생활에 정점을 찍고 있었는데.. 늘 친구들과 몰려다니고, 파티에, 거의 늘 업 되어있거나 좀 미쳐(!) 보여있었다;; 실제로 후에 남편이 말하기를.. 그 때 나를 보면 늘 머리속에 빨간 경고불이 들어왔다고.. 관심있어서 두근거리는 그 경고등이 아니라, 'she's crazy, stay away'하는 미친ㄴ 주의 경고등 -_-;;; 내게도 그는 배려심있지만,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건 아닌 그런 친구였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같이 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우리가 커플이 된 후, 당연히 우리는 로맨틱 달달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싸우면서 보냈다;;; 처음 시작은 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는 전 여친들 때문이였고.. 나중에는 성격차이였다. 그가 고집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논리/원칙 주의자인걸 알고 있었지만, 나 역시 그냥 순순히 수긍하고 넘어가는 성격은 아니였기에, 뭐가 하나 부딪치면 완전 서로 기름을 뿌려가며 불태워 싸웠다;;; 그 역시 '나한테 이렇게까지 안지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연애에 있어 그는 연애 경험이 적은 편이 아님에도 마치 여자를 배려하는 연애는 안해본건지, 못해본건지... 아니, 어쩜 이리 눈치가 없나, 싶을 순간도 많고.. 특히 선물에 있어서는 완전 젬병이라, 아예 아무 선물을 안주거나, 한번 주면 극을 달린다든지.... 예를 들어, 출장을 다녀올 때 흔한 초콜렛 하나 안가지고 오길래, 올 때 뭐라도 좀 사오라고 했더니... 이건 무슨, 요즘 초등학교 4학년도 안쓸 것 같은 고양이가 그려진 가방을 사온거다 (고양이도 좋아하고, 가방도 좋아하니, 그럼 고양이가 그려진 가방을 사가자, 뭐 이런 생각?);; 사이즈도 애매해서 장보러 갈 때 쓸 수도 없고... 그렇게 옷장에 고이 모셔놨더니 서운했는지, 왜 안 쓰냐고 묻길래 솔직히 대답해줬더니, 다음에는 두바이에 출장 갔다가 돌아올 때, 내가 들면 그 광택에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휘황찬란한 번쩍이는 온갖 자수가 놓은 작은 가방을 사온거다;;; 그래서 그냥 다음부터는 선물 사오지 말라고, 때려치우라고 했더니, 이제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디 다녀올 때마다 작은 인형을 하나씩 사서 온다 (내가 인형을 딱히 좋아하는 것도, 모으는 것도 아닌데;;;; 왜?? 이건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 이제 묻지도 않는다. 그저 감사히 고맙다고 말하며 받을 뿐;;;)
그런가 하면, 좀 쉬고 싶다고 했더니, 네덜란드로의 깜짝 여행을 준비하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주말 동안 혼자 스페인 휴양지에 가서 쉬다 오라고 숙소예약확인과 비행기 표를 선물이라고 내 앞에 내놓는 등, 완전 극을 달려서 사람을 기겁하게 하기도 한다 (저 스페인 휴양지 예약 후, 그에게 결국 '메뉴얼'을 제공했다. 첫번째 목록은 '절대 50파운드 이상의 깜짝선물을 준비하지 않을 것';;;;)
이미 말했다 시피 원래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사사로운 사교성이 딱히 좋은 것도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딱딱한 인상으로 보이기도 하고, 날카로운 부분도 있고.. (사실 한국 가족들은 여전히 그의 눈치를 보거나 어려워한다;;;) 간단히 말해, 절대 '비정상회담' 같은 곳에 나올 성격은 아니라는 거... 그래서 그런지 뭐라 딱히 '내 남편 귀엽죠, 달달하죠, 세심하죠, 친절하죠'할 만한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 있다 하더라도 아주 개인적으로 내게만 해당하는게 많아서 딱히 뭐라 나누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는 그렇게 단역으로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그를 주연으로 한 이 글을 쓰고 있냐면... 어제 대판 했기 때문에...;; 아주 간만에, 서로 기름을 부었고, 활활 태우다가, 내가 그에게 비수를 꽂으면서 그의 불길이 꺼졌다. 그는 상처받았고.. 나는 그걸 알았다. 그런데도 내 속의 불이 덜 타서 미안하다고 하는 대신, 더 말을 쏘아대고는 나와 버렸다... 나는 그를 이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그를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모든 다툼과 싸움 끝에서 나는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를 했지만, 그런 나를 잡고 있었던 건 그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나를 잡은 건 그였다. 나란 사람. 참 못났다. 몇번의 실패와 상처 끝에 이제는 좀 성숙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맺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인데..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게 나만 잘나서 그런게 아니란 걸, 그 당연한 걸 이제야 새삼 깨닫는 거다... 다시 다짐해야지. 후회하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