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생활의 권태기를 겪고 있다
처음 어학연수로 영국에 온게 2002년, 그리고 유학으로 다시 영국에 돌아온게 2004년. 그 후 계속 영국에 머무르고 있다.
어학연수 도중에 유럽으로 한달간 배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영국에 돌아오는게 반가웠다. 다크초콜렛 다이제스티브 비스켓이 그리워 돌아오자 마자 당장 수퍼마켓에서 한봉지 사서 뜯어 먹기도 했을 정도로..
유학 생활을 시작한 후 1-1.5년 간격으로 한국에 들어갔다 왔는데... 처음 한 3년 정도는 좀 우쭐한 마음이 컸다. 혹시라도 영어를 까먹을까봐 일부러 영어 소설책을 들고 갔고, 한국에 있는 시간에도 시간이 되면 BBC를 틀어놓고.. 은연 중에 '나 외국물 먹고 사는 여자야'하는 티를 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었던 거 같고... 괜히 어디서 영어가 들려오면, 나도 그 정도 알아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고 티내고 싶은 그런 두근두근한 마음도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주문도 가능하면 영어로 하고.. 그래서영국에 돌아오면 안도감이 들었다. 다시 궤도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3년 정도 지나고 영국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한국이 그리워졌다. 커피숍에 가서 막 수다 떨고 싶고, 저녁 6시가 넘어 어둡지만 온갖 가게의 조명들로 밝아진 거리를 걷고 싶었고.. 한국말로 된 책이 읽고 싶었고... 그 때는 영국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도 아주 자연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 나 여기 살아, 나 여기 알아'하는 그런 기분이랄까... 그 때쯤에는 한국의 친구들과 거리가 멀어지고, 영국에 있는 친구들과 더 가까워진 시기라서, 도리어 영국에 있는게 더 좋았다. 한국에 있어도 메일을 확인하고, 페북을 확인하고, 영국의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하고,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영국에 있는 친구들과 더 공유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이 맘때 쯤 보통 생활패턴이나 행동/말투도 영국식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하는게 아닌데도 무의식중에 영국에서 하던 버릇들이 나오곤 했다 (예, 전화를 받으면 자연스레 'Hello'부터 나온다던지..). 한국말을 할 기회가 별로 없다보니, 말투에서 사투리도 많이 없어지고, 그래서 부산에 가면 도리어 서울에서 왔냐는 소릴 듣고, 서울에서는 외국 살다 왔냐는 소릴 들었다;; 그 때는 영국에 돌아오는게 더 기대되고 설레였다. 빨리 돌아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일을 시작하고, 친하던 친구들도 박사과정을 마쳤거나 마치고 다른 곳으로 떠나가기 시작하면서 부터 영국에 대한 마음도 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배나 다른 동기들이 캠브리지나 옥스포드의 생활에 대해 흔히 말하길, 일단 떠나보면 그 동안 얼마나 'bubble'안에 살았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어떻게 보면 캠브리지에 있는 동안, 정말 눈에 콩깍지가 낀 그런 생활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만날 기회는 많았고, 영국의 여름은 찬란하고 녹색으로 빛나고, 공원은 피크닉을 즐기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대화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영국의 겨울은 차갑고 시렸지만, 그래도 800년 된 도시에서는 꽤나 예쁘게 보였고, 매주 친구들과 갔던 Formal hall에서 와인에 포트에 쉐리에 먹고 마시다 보면, 밖의 차가운 공기도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 였으니까.. 우리는 날씨와 음식에 대해 늘 불평했지만, 같이 불평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Jacket potato는 나름 맛있었다.
그런데 그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니 갑자기 번쩍거리고 사람들 북적거리던 클럽을 나와 혼자 취한 사람들과 지저분해진 밤거리를 걷는 것 마냥 내 영국 생활이 달라졌다. 당장 옮긴 대학에서 캠브리지 때 처럼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대한 나는 번번히 실망했고, 그제야 영국사람들과 친해지는게 얼마나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캠브리지에서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많은 걸 제공했는지도 깨달았고... 그런 안전장치 없이 어떻게 보면 영국생활 7-8년만에 진짜 영국의 민낯을 마주하게 됐다고 하나... ;; 남편이 있음에도 영국생활은 외로워져갔고, 이미 영국에 사는게 꽤나 익숙해 진 상태라서, 마치 연애할 때 권태기 마냥 더이상 설레이고 좋은 점보다는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지금 사는 시골로 이사온 후로는 그게 더 심해졌다;; 여기서 본 영국인들은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마냥 이해할 수 없었고 (따지고 보면 잉글랜드에서 웨일즈로 온거니 다른 나라이긴 하지;;) 그제야 내가 얼마나 영국의 다른 부분에 속해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영국에 돌아오는 건 더이상 설레지 않았고, 도리어 자꾸 어딘가로 가고 싶어졌다. 떠나고 싶었고, 여전히 녹색으로 빛나는 영국의 여름은 심심했고, 눈으로 덮이기도 한 겨울은 춥고 답답했다...
그리고 작년 브렉시트를 전후해서 영국에 대한 내 감정은 완전히 다른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완전히 실망해버렸다고 하나... 특히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수없이 'Vote Leave'의 빨간표시를 봤던 나로서는, 마치 'Migrant'이란 주홍글씨가 내게 박혀 있는듯, 이곳이 부자연스럽고 이질스레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영국에 돌아올 때마다 고스란히 내 감정상태에 투영됬다.
영국에 도착해서 Immigration control에 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또 무슨 질문을 해댈지, 짜증부터 났고, 날선 바람에 저절로 'uh, I hate it'하는 소리가 나왔으며...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가기 전에 어디 멈춰서 식사부터 하는게 좋겠다는 얘길하는 동시에, 도대체 뭘 먹냐고 얼굴부터 찌푸렸다.. 분명 예전에는 기차역에서 파는 Upper Crust의 바게트에도 설레였는데! 어차피 장도 봐야 하니 수퍼마켓에서 식사도 해결하자고 하고서는 Sainsbury's에 갔는데.. 카페가 여전히 추워서.. 탁자는 정리도 안되어 있고, 다 먹은 후 쟁반을 돌려놓는 공간이 있음에도 그냥 탁자 위를 치우고 가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또 인상을 찌푸렸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Come on, not everything is bad. Be positive"하고 내 기분을 풀어주려 말을 했는데...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아. 내 마음이 변했구나. 영국에 대한 내 사랑(?)이 식었구나. 만약 영국이 내 남자친구라면, 그 때 아마 '미안, 우리 헤어지자'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정하게 된건데... 그게 영국에 대한 지금 내 마음이다. 나는 내 영국생활의 권태기를 겪고 있다. 내가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다고 생각했던 영국사람들은, 요즘 들어 매일 듣게 되는 브렉시트에 관련된 온갖 개소리를 들으며, 고상한 척 하지만 이기적이고 우월주의에 빠져 있거나 험하고 거칠고 무례한 것 같고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느리지만 정도를 지킨다고 생각했던 방식들은 최근에 겪은 대학에서의 상황과 맞물려, 지 좋을 때만 룰을 끄집어내는 아주 귀찮고 배려따윈 없는 불공평을 교묘하게 속이는 불투명한 방식처럼 여겨진다 (최근 BBC 중국 리포터가 BBC를 비판했던 것처럼!). 영국의 오래된 집은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고, 정작 믿을만한 수리공들은 없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는 괜찮은 까페나 음식점도 없어서, 음식에 대해서 불평도 더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그런지... 영국에 돌아온지 불과 3일밖에 안됬는데... 벌써 지친다. 거기에 돌아온지 바로 다음날부터 열이 오르고 아프기 시작한 두 아이를 돌보느라 더 진이 빠졌다. 그 와중에도 남편과 둘이서 저녁이고 이른 아침이고 아이들을 돌보느라 하지 못했던 일을 한다고 바빠죽겠는데, 오늘 또 내 라인매니저로부터 쫑알되는 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우리는 요즘 영국을 언제 떠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이 자주 얘기한다. 물론 일도 있고 아이들 학교도 있으니 당장은 안되겠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에는 둘다 동의하고 있다...
괜히 기분이 묘해진다. 마치 사랑이 식어버린 걸 확인하고도 여전히 '연애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연인처럼.. 예전에는 안이랬는데, 이때는 좋았는데, 그러면서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 때로 돌아가기 위해, 괜히 그 때 했던 것들을 다시 해보려고도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다시 내가 좋아했던 부분들을 찾아보려고도 한다. 그러다가 또 우리는 왜 이렇게 되버린걸까, 하는 울적한 센티멘탈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정말 질려버려서 당장 결별을 통보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도 싶어진다. 동거를 시작했다가 아직 계약기간이 남아서 막상 헤어지지도 못하고 같이 살아야 하는 연인처럼,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을 가진체 매일을 보내고 있다... 이 일을 어찌하나....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