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베란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고등학교 때 교외 활동을 하다가 어떻게 알게된 인연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남자 아이가 있었다. 정확히는 세 다리나 건너뛰어 알게 된 사이였지만, 중간 친구였던 J덕에 어찌어찌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펜팔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은 손편지를 쓰는 사람조차 잘 없겠지만, 그 때는 펜팔이 나름 유행이였다 ㅎㅎ). 그 아이, M은 긴장할 때 눈이 약간 사시가 되는, 수줍고 말이 적고, 대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를 때는 강한 목소리가 나오는 아이였다. 서로 어울려 노는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그애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내가 그냥 예의상 다른 친구들을 포함해 다 사서 준 발렌타인 초콜렛에 대한 보답이라고, 그 아이는 손으로 직접 사서 꾸민 것이 분명한 사탕 꾸러미를 내밀었고, 후에는 거북이 천마리를 선물로 받았고, 편지는 무척이나 자주왔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 아이는 후에 내 첫 남자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내 핑크빛 풋풋하고 순수했던 고등학교 때의 연애담이 시작되었으면 오죽 좋겠느냐마는.... 그 시기는 우리 둘에게 꽤나 끔찍했고, 무수한 상처를 남기고 끝났다.
친구가 아닌,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함으로서 시작된 그 관계는, 내가 얼마나 뒤틀리고 끔찍한 사람인지 깨닫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동안 내가 모른척 다 담아두고 막아두었던 내 음침한 과거와, 마스크로 잘도 가리고 다니던 내 진짜 추한 모습이 숨길 것 없이 그대로 드러났고, 난 마치 그애를 상처입히지 못해 안달난 사람인냥 굴어댔으니까.. 그러니까 처음으로 겪은 그 관계에서 나는 어떤 식으로 선을 유지해야 할 지 몰랐다. 그리고 타인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몰랐다. 아는 척 모르는 척 그냥 일상처럼 지나가는 가족도 아니고, 기대도 바램도 없이 적당하게 떨어져서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친구 관계도 아닌... 내게 때론 가족보다 더한 관심을 보여주고, 친구를 포함 내가 겪어온 왠만한 인간관계라면 궁금해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을 내 과거와 감정과 일들을 궁금해하는 그 '남자친구'라는 존재가 꽤나 낯설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그 아이와 비슷한 수준의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지고 관계를 시작하지 않은게 문제였을 수도.. 아니, 이런 저런 '처음이라 몰랐다'라는 변명을 들이댄다하더라도, 그걸로 내게 면죄부를 줄 순 없을 거다.
내게는 처음보는 이에게 내 이름과 가족 관계를 설명하듯 간단하지 않은 뒤틀인 과거와, 하나의 죽음을 겪으면서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꾹꾹 담아놓은 분노가 있었고.. 거절당하거나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고, 무엇보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강했다. 적당한 거리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것들이, 그 아이가 내 선안으로 들어옴에 따라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애를 시험하고 시험했다.
내가 이래도 넌 나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내가 이런데도 넌 내 곁에 있을거야? 네가 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네가 알긴 뭘 알아. 넌 나를 몰라. 결국에는 너도 나를 버리겠지. 넌 나를 만난걸 후회하게 될거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냥 떠나가...
그러다가 진짜 그애가 화가 나버리거나 나를 외면하면 나는 절망스러워져서 다시 그애에게 매달렸다. 넌 내가 어떤 걸 겪어왔는줄 알잖아, 나한테 너까지 이러지마, 네가 이러는게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줄 알아,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내가 말했잖아, 너도 못견딜거라고. 그래, 가버려. 난 그냥 혼자 남아 죽어버리겠어.
.... 이런게 고등학교 시절동안 반복되었다. 그애가 나를 피하면 난 그 애 집앞까지 찾아가 한정없이 기다렸고,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러다가 우울함이 찾아오면 그애의 연락도 일부러 피하고, 기다리게 하고, 만나면 모질게 굴고... 그애가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마치 어둡기만 하던 내 세계에도 방문자가 생긴 마냥, 이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들떠 있다가, 나같은 걸 누가 진짜 좋아하겠어,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이 괴로워졌다. 이 아이는 여전히 내가 밝고 웃음많은 사람인줄 알고 좋아하는거겠지, 내게 이토록 많은 어둠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를 당장 떠나는게 아닐까. 그래서 확인받기 위해 발버둥치고, 그애를 고문하고, 할퀴고.. 그러다 그애가 지쳐보이면, 마치 내 예상이 맞았다는듯 다시 그 아이를 몰아치고..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정말 질식하고 짜증나 죽어버릴 것 같은 그런 관계가, 우리의, 아니 그 아이의 풋풋했어야 할 첫사랑의 기억이 되어버린거다... 우리 관계는 수능 전후로 당장 우리 앞에 닥친 불을 끄느라 정신이 없어지면서 '우리 그만하자'라는 이별통보도 없이 서서히 끝을 맺었고,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냥 그렇게 과거로 묻혀져 버렸다. 그리고 전에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란 포스팅에서 썼듯이 그애를 다시 만난 건 그 후 3년 후. 그아이는 직장암 말기였고, 그 충격적인 소식앞에 이제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서로 그딴 과거는 다 잊어버린냥 웃고 시시껄렁한 농담들만 하다가, 혼수상태에 빠진 그 애의 손을 잡고 줄곧 '미안하다'라는 말만 해준게 마지막이였다. 그 후 일주일도 안되어서 그 아이는 숨을 놔버렸으니까...
내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주고, 나를 견뎌내고, 어떻게든 내게 희망이 되고자 했던 그 아이는 더이상 이곳에 없고, 그렇게 모질게 굴어대던 난 그 친구 이후 다른 여러 사람들을 만나 실패를 반복하고, 그 경험들을 통해 내 안의 모난 돌을 갈고 갈아서 이제야 좀 편해진 마음으로 나름의 균형을 잡으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어나가고, 심지어 지금은 내 가족을 만들고 다른 두 생명을 책임지기까지 한다.. ... 참 불공평하다.
M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정도. 그 이상은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말로 차마 설명하지도 못하는 그런 감정들. 여전히 때로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거나, 잠에게 깨우게 하는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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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에서 연재되고 최근에 완결된 이제 님의 '밤의 베란다'... 그 웹툰을 읽으며 나는 다시 M을 생각했고, 이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극중의 민주와 온처럼 차라리 우리가 처음부터 어찌할 수 없이 끌리면서 사랑했더라면, 정말 서로를 필요로 했더라면, 우리는 괜찮았을까. 설사 결말이 지금과 같았더라도, 그걸 회상하는 내 마음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까. 내가 그 때 미친듯이 그애의 심장에 그어댔던 상처들이 마치 그 아이의 암세포로 변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됐을까..
나는 때로 내가 잘 살아남았다고 스스로 토닥거리지만, 또 많은 순간 내가 상처입힌 사람들을 기억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나를 증오하며 떠나갔고, 나와 만난 걸 후회한다고 떠나갔고, 행복을 빌어주며 떠나가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순진했고, 어떤 이들은 잔인했고, 어떤 이들은 희망적이였고, 어떤 이들은 나만큼 뒤틀여있었다. 그런 관계들을 기억할 때 지금은 단 한가지 생각밖에 안든다. 내 위선에 가까운 바램이지만, 제발 그들이 행복하기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발 그들이 나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지금 그들의 삶에 내가 끼친 영향은 전혀 없기를...
* 다음 웹툰 링크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nightveran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