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free story

여왕의 생일과 평민의 삶

민토리_blog 2016. 4. 20. 18:59

BBC1 Breakfast show를 틀으니 내일이 영국 여왕의 90번째 생일이라고 떠들썩하다. 윈저의 한 초등학교에서 6-7세쯤 되는 아이들이 노래 연습하는 걸 반복해서 보여주고, Care home에 있는 윈저 출신의 90세 노인 두분이 내일 여왕을 만나러 갈거라며 인터뷰를 한 걸 보여주고, 여왕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몇번이고 방해받았다고 투덜거리며 말하는 비슷하게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늙은 화가의 말도 계속해서 들려주고 있었다. 로얄메일은 여왕과 여왕의 아들, 손자, 증손자가 완벽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사진을 바탕으로 우표를 만들거라고 했고, 거기에는 고작 3살 남짓할 여왕의 증손자 Prince George가 아주 멋지고 환하게, 완벽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초등학교 학생들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은 아주 거리낌없이 90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Very old, you can't do anything" (여왕이 이말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ㅎㅎ) 하고 대답했고, 어떤 아이는 내일 온갖 왕족 앞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 '영광'에 대해, "Freaky"하다고 대답했다 ㅎㅎ 


케어홈의 90세 되는 노인분 두분은, 

"She walked backwards. I can't believe it. I can't do that. It's shocking"하며 몇번이고 고개를 흔들며 믿을 수 없다고 말을 했다. 여왕이 어떻게 지팡이도 없이 걸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며.. (이렇게만 들으니 마치 여왕이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춤이라도 춘줄 -_-;;;;) 


몇년전 (2012)에는 여왕의 왕위즉위 60년된 Diamond Jubilee라고 떠들썩하게 영국 왕족의 역사과 그녀의 지간 시간들을 보여주더니, 올해는 90번째 생일이라고 또 여왕의 지나간 시간들과 사진들이 다시 보여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참 대단하다 싶다. 다이애나 비도 죽고 난 후 잠잠하더니, 윌리엄 왕자의 결혼과 잇달은 출산으로 부쩍 활기를 띄는 것 같다. 물론 거기에 새로 결혼한 Duchess of Cambridge Kate의 아름다움과 매력이라는 기름이 부어진 거겠지만... 


얼마전 저녁에 남편과 나는 거실에 앉아 하루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느슨한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서로 별 할 말도 없어졌고, 난 내일 또 아이들과 뭘 해야 하나, 저녁은 뭘 해먹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에게 "What should we have for dinner tomorrow?" 하고 물었는데, 남편은 내 질문은 듣지도 못했다는 듯, 멍하니 있다가 한다는 소리가, "She's really pretty, isn't she?"....

그 때 텔레비전에서는 윌리엄왕자와 케이트 왕자비가 인도에 간 걸 뉴스에서 보여주고 있었고, 티비화면에서 그녀는 그녀만의 밝고 매력적인 웃음을 날리며 크리켓을 하고 있었다. .. 그 순간 짜증이 확 하고 올라왔다. 그래서 울컥 하며, "Yes, she is fucking pretty, so what do you want to eat for dinner tomorrow?"하고 대답해버렸다;; 

남편은 내 열난 목소리와 욕설에 놀래 'what's your problem'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난 '그래서 저녁은 뭐 먹을거냐고' 하고 소리를 높이고, 남편은 "I don't know. I don't care"하고 답했다. 그리고 그게 그날 저녁 우리 부부싸움의 시작이였다;; 난, "Yes, she's pretty, we KNOW that, but it got nothing to do with us. So you care about how pretty she is, but you don't care about what YOU eat?!"하고 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남편은 방어적인 태도로, 그 둘이 무슨 상관이냐고, 당신도 종종 예쁜 여자들 보면 예쁘다고 말하면서 왜 내가 한번 말한거 가지고 그러느냐, 그리고 정말 난 내일 뭘 먹든 상관없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 요리 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건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왜 그런식으로 말하냐,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도 기분 나쁘다, 등등.. 주장을 펼쳐대고... 우리는 한동안 으르렁 대다가, 내가 맥이 풀리면서 싸움을 그만두고 화해를 했다. 


그러니까, 그건 남편의 잘못은 아니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화가 났다. 두번이나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한 왕자비였다. 내가 입덧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먹지도 못한체 한국 음식이 그리워 울면서 소파에 널부러져 있을 때, 뉴스를 통해서 그녀가 입덧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거기에 최상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첫번째 출산을 제왕절개를 통해 한후 여전히 붓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다리에는 압박붕대를 감고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나와는 달리, 그녀는 출산 후 바로 용감하게 밝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마치 출산 따위는 한 적 없다는 듯 여전히 날씬하고 멋진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새로 태어난 아기를 안고 있었다. 두번의 출산 후 예전의 몸매로 돌아가기 위해 미친 듯이 운동을 하면서도 왠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나이의 강을 건너온 듯 거울 앞의 나를 볼때마다 조금씩 서글퍼지는 나와 달리, 그녀는 두번이나 출산한 걸 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고 멋진 모습이였다. (그녀도 분명 어느 우울한 날에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한숨 내쉬는 순간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그런 그녀의 근심을 감출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옷과 화장법을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테니,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무턱대도 싫어할 수 없게 하는 어떤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녀를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막 좋아하거나 그녀의 스타일을 찾아보거나 하진 않는 그런 적정선을 내 나름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는 그 적정선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정말 심각하게 도대체 다음날 아이들과 뭘 해야 할지, 또 뭘 요리해서 먹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건 우습고 서글프게도, 그리스 섬에 갇혀 있는 피난민들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보다, 내게 그당시 좀더 깊고 심각한 현실의 고민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남편이 왕자비에 대한 칭찬을 입밖으로 내뱉았을 때, 순간 어두운 방안에 조명이 켜진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명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고, 난 여전히 어두운 구석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 처럼 말이다. 난데없이 질투가 끓어올랐다. 나도 아이 둘이 있어도 저렇게 멋지고 예쁜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싶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을 가보고 싶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웃고 즐기고 싶었다. (물론 어쩌면 그녀를 포함한 온갖 왕족들은 그런 멋진 표정과 포즈를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지겨워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내가 짓고 있는 웃음이 이상하게 찍혀 나중에 신문에 도배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날 내가 화를 낸건, 사실 왕자비를 향한 것도 아니였고, 남편을 향한 것도 아니였고, 그저 내게 일어나지 않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가지지 못한 어떤 것들에 대한 동경과 질투를 향한 거였다. 


영국의 왕족을 보고 있노라면, 책이나 만화, 영화로 접하던 가상의 왕족을 접하는 것과는 다른 묘한 기분이 든다. 가상의 왕족이라든지, 심지어 다른 나라에도 존재하는 그들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그냥 그렇구나, 저 나라는 여전히 왕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정도이다가, 막상 이 나라에 살면서, 그것도 꽤나 현실감있게 그들의 일상과 과거의 모습들을 시시때때로 보다보면, 뭐랄까.. 질투랄지, 동경이랄지, 상대적 박탈감이랄지, 뭐 그런 현실적인 감정들이 생겨나는거다. 이건 한국의 잘나간다는 연예인들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인데.. 그들을 보면, 뭐든 일단 자기가 가진 걸로 뭘 해서 그만큼 돈을 벌었다는 생각이 들고, 어떤 집에 살든, 뭘 하든, 그냥 '와, 돈이 많구나, 여전히 잘생겼구나, 예쁘구나'하는 정도인데.. 왕족은 정말 말그대로 그냥 '태생'에 의해 정해진거 아닌가. (하긴 한국뿐 아니라 요즘 세계 재벌들은 세물림이 많으니, 그것도 거의 왕족에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인가?) 그런데 그냥 돈많은 재벌집에서 돈많게 태어난 것과 달리, 그들은 어떤 태생적인 '고귀함'을 존중받는 기분이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세속적인(!) 잣대가 아니라, 그냥 '왕족'이라서 그들의 존재가 무게를 가지게 되는거다. 그들은 대놓고 돈지랄을 하는대신, 완벽하고 진지하고 때로 느슨하게 자원 봉사를 하고, 병사들을 만나고, 유니폼을 입고, 손을 흔든다. 그들의 윈저 성에서 쓰는 물품이 얼마나 값이 나가든지 간에, 우린 그걸 '돈지랄'이라고 부르는 대신 '귀품'이라고 부르는거다. 그럴 때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들을 왕으로 만드는건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서 내려준 귀한 보자기를 감고 천사의 인도를 받으며 내려온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가끔 영화를 보다가,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왕을 피신시키며, '당신이 살아남아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다'하는 말을 들으면, 당장 저 왕과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목부터 베어버리고 싶은 짜증이 솓구치는 것처럼..  그렇게 왕이 살아남으면 그 왕 개인의 삶에 미래가 있는거지, 이미 죽어버린 온갖 사람들의 미래는 이미 없어져 버린 거 아닌가. 그런 걸 볼 때면 사람의 생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도 왠지 무색해진다. 죽음에는 귀천이 없을지 몰라도, 당장 살고 있는 우리네 삶에는 마치 귀천이 매겨진 것만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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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잡다한 소리다.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는 우스워서, 나중에는 그녀의 목숨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군대 수준의 사람들을 상상하다가 쓰게 된 글이다. 아마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축복하는 생일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영국뿐 아니라 50개가 넘는 Commonwealth 나라들의 여왕이기도 하니까. Long Live the Que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