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개국어 하는 아이 키우기
이 블로그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집에서는 3개 국어가 공존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한국어, 남편이 아이들에게 말하는 스페인어, 그리고 남편과 내가 쓰는 영어. 올해로 만 4살이 되는 첫째꼬맹이는 이제 자기 주장도 펼치고, 나름의 이유도 대가며 남을 설득시키려 할 만큼 말을 제법 많이, 잘하는 편이고, 만 2살이 되는 둘째꼬맹이는 이제 간단한 단어라든지, 좋다 싫다 같은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정도다.
아이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한국말을 썼고, 남편은 스페인어를 썼는데, 첫째꼬맹이 같은 경우 아무래도 나와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보니, 처음 배우고 쓰는 말들이 한국어였다. 예를 들어, '이거 뭐', '물', '밥', 이런 정도.. 그리고 함께 육아교실이니, 놀이방이니 뭐니 많이 데리고 가고, 여기서 알게 된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아이 엄마들과 친해지면서 같이 놀고 그러다 보니, 한국어 다음에 배우는 건 영어였다. 'No'라는 말은 당연히 가장 빨리 배웠고, 다른 어른들이 쓰는 말이나 단어보다 자기 또래의 다른 꼬마들이 쓰는 말을 따라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비슷하게 첫째 꼬맹이와 같이 놀던 영국인 친구들의 아이들도 첫째꼬맹이의 한국어를 따라하기도 해서, 엄마들을 놀래키기도, 웃게 만들기도 했지만.. 첫째는 내가 5개월즈음에 강의를 다시 시작하면서 어린이집에 빨리 다니기 시작한 편인데, 그래서 그런지 만 2살 쯤 되었을 때는 대부분 한국어, 영어로 말을 했다. 물론 간단한 것들은 스페인어로 말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한국어, 영어로 말을 했다. 그러다가 2살 반쯤 되었을 때, 아이들 둘을 데리고 내가 스페인 시댁 집에 3달정도 머무는 동안 첫째의 스페인어 실력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 3개월을 생각하면 지금도 쓰디쓴 알약을 그대로 씹어먹은 마냥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긴 하지만,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일주일에 몇일, 이런 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게 아니라, 5일 전부 다 보내거나, 오전, 오후만 보내거나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첫째는 스페인에서 머무는 동안 일주일에 5일, 9-5시까지 유치원에 갔다. 물론 이것도 지금 생각하면 극단적이였다는 생각이 들만큼 후회가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뭐 그런 부정적인 기억들을 뒤로 다 보내버리고, 좋은 점만 기억하자면, 그래도 그 기간동안 첫째의 스페인어 실력은 엄청나게 향상되었고, 둘째의 출산과 함께 원점으로 되돌려졌던 배변훈련도 성공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3개월을 지내고 난 후, 영국에 돌아왔음에도 첫째의 스페인어는 여전히 유창하다. 마치 누가 '듣고 이해는 하지만, 아직은 닫혀 있는' 스페인어 말문을 뻥하고 뚫어준 것처럼!
첫째 꼬맹이는 여전히 어린이집에 주중 3일은 간다. 꼬맹이의 영어 실력은 매번 향상되고 있고, 이제는 내가 뭘 하면, 'Well done, mummy'하고 칭찬까지 해준다;; 아이는 대부분의 모든 말을 아주 자연스레 영어로 하고, 내가 '엄마한테는 한국어로 해야지' 하면, 좀 생각하다가, 스페인어로 말을 한다 -_- 그래서 다시 '한국어'로 하라고 하면, 아주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알고 있는 단어들만 연결해서 말을 하다가, '몰라'라고 끝맺는다;; 작년 겨울에 한국에 갔을 때, 첫째 꼬맹이가 한국말을 좀 더 많이 배울 수 있길 바랬는데, 여전히 아이는 한국말을 다 이해하고, 간단한 문장 '배고파요, 몰라요, 주세요,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생일 축하' 같은 말을 할 수 있긴 하지만, 영어나 스페인어 처럼 하고 싶은 말을 문장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반면, 둘째 꼬맹이는 나나 남편의 말보다, 첫째 꼬맹이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때가 많다. 우리가 아무리 옆에서 한국어, 스페인어로 얘길 해도, 첫째꼬맹이가 영어로 말하면 그걸 그대로 따라하고, 한국어나 스페인어로 말해도 그대로 따라한다. 내게 영향을 받아서 한국어로 처음 말을 배우기 시작한 첫째 꼬맹이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물론 둘째 꼬맹이도 나나 남편이 한국어/스페인어로 하는 말은 다 이해하고, 첫째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영어도 이해한다.
어쨌건, 요즘 주위에서 아이들이 다개국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혼란이 오진 않는지, 어떻게 다개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어릴 때부터 키울 수 있는지 질문을 많이 해서, 내 아이들과 주위의 다개국어를 쓰는 아이들을 관찰한 결과 몇가지 사실을 요약하자면.....
1. 거의 100%로 아이들은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는 당연하게, 원어민처럼 받아들이고 쓸 수 있다. 물론 Expat community처럼 이민간 후에도 그 사회에 어울리지 않고, 이민자들끼리 모여 살거나, 그들과만 소통할 경우, 한인사회라고 예를 들었을 때, 다른 외국에 살더라도 한인타운에서 한국사람들과 대부분 만나고, 한국말로 소통하고, 한국 학교를 다니는 경우는 당연히 그 외국의 말을 익히는게 쉽지 않겠지만, 아무리 집에서 한국어를 쓴다고 한들, 영국 학교를 다니고 영국인들이 사는 곳에서 같이 어울려 살고 있다면, 당연히 아이들은 영국인처럼 영어를 배우고 쓴다.
2. 다개국어를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접할 경우, 아이들은 그 말을 이해하고 알아듣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말을 잘 하는 건 아니다. 내 아이들도 그렇고, 영국/프랑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에 살고 있는 친구 가족의 경우에도 아이들은 프랑스어를 다 이해하지만, 프랑스어로 말하는 일은 없고 다 영어로 말한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다개국어 '말'을 잘하려면 계속 연습을 시키거나, 그 언어를 하는 최소한 2명 이상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겪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문' 트여주는 것처럼.
3. 아이들은 의외로 어른들보다 또래의 말을 더 빨리 배우는 듯 하다. 톤 같은게 비슷해서 빨리 따라하는걸지도? 그리고 의외로 같이 놀게 하면 서로 다른 언어를 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지들끼리 이해하고 알아서 논다;; 그런 의미에서 만약 지금 살고 있는 곳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아이가 배우길 원한다면, 어른 선생보다는 그 언어를 쓰는 또래 아이들과 자주 놀게 하는게 더 좋을지도.....
4. 문법 구조가 비슷한 언어는 아이들도 더불어 빨리 배운다. 예를 들면, 첫째 꼬맹이의 경우 때로 스페인어를 문법적으로 틀리게 말할 때가 있는데, 따져보면 대부분 영어에서 스페인어로 직역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 Que es esto para, 라고 말하는 경우, 문법적으로는 'Para que es esto'라고 말하는게 맞지만, 영어 문장 'What is this for'를 직역해서 말했기 때문에 틀렸다). 비슷하게 간단한 한글문장도 문법적으로 틀릴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Give me an apple please'했다가 내가 한국말로 해, 하면, '주세요, 사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한국어는 영어, 스페인와 문법적으로 구조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첫째꼬맹이는 종종 혼란스러워 한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단어 단위로 바로 바꿔끼워도 말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말은 그렇게 딱딱 단어별로 나눠서 조합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 무엇보다 동사가 먼저 오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문장 처음부터 대충 짐작이 되는 영어/스페인어와 달리, 한국어는 말을 끝까지 다 들어야 무슨 동사를 쓰는지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아이가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번역해서 아이에게 들려주고 따라하게 하기에는 꽤나 번거롭고 아이도 흥미를 금새 잃는 경우가 많다... ㅜ_ㅜ
5. 아이들은 자기가 말하는 상대가 쓰는 언어에 따라 가끔 놀랍게도 빠르게 언어를 전환할 수 있다. 첫째 꼬맹이는 나와 말할 때, 3개국어를 다 섞어 지맘대로 문장을 만들어 말하는데, 남편이 '스페인어로 말해'라고 하면 스페인어로 하고, 밖에서는 항상 영어를 쓴다. 심지어 둘째 꼬맹이에게 말하거나, 혼자 역할놀이를 하며 놀때도 영어를 쓴다... (아니,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국어로만 안쓰냐고! )
6. 이제 막 말을 배우고 하기 시작하는 만 2-3살까지만 해도, 사실 어떤 언어를 쓰든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이해하고 바로 따라하기도 했는데 (주변 영국인 친구들 아이에게도 가끔 한국어로 말한다;;), 말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는 만 3-4살이 되니 확실히 다른 언어를 예전만큼 받아들이지 못하는게 보인다. 어렸을 때는 내가 한국어를 쓰든 영어를 쓰든 이해했다는듯 행동하거나, 내가 쓰는 한국말을 억양 그대로 따라하기도 했던 친구 아이들인데, 요즘에는 내가 한국어를 어쩌다 쓰면, 나한테 "I don't understand, it's not English"하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에 있는 친구 아이들도, 예전에는 내가 어쩌다 영어를 쓰면 그걸 그대로 따라해서 놀래켰는데, 요즘에는 유치원에서 영어를 배운다고 하는데도, 도리어 부끄럽게 숨는 걸 보면, 벌써부터 '언어의 다름'을 깨달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한국에 살지만 아이가 다른 언어 (예, 영어)도 잘 하길 바래서 묻는 분들에게는... 집에서 최소한 2명이상이 영어를 쓰고, 그게 아니라면 영어를 쓰는 다른 사람, 아이들과 종종 만나서 놀게 하는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고... 물론 부모 본인도 함께 영어를 쓰며 어울리는게 더 나을거다. 그럼 언어가 자연스러운 대화의 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질테니까. 그리고 우리도 부끄럽고 어색해서 못하는 언어를 아이 너는 해봐라, 하는건 좀 불공평하지 않는가..
외국에 살면서, 아이가 한국어도 모국어처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반대로 최소한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집에 2명 이상이 되거나 (부모가 다 한국인인 경우), 한국어를 쓰는 사람, 아이들과 교류가 잦고 노는 경험이 많거나, 아님 아예 한국 학교를 다니거나.. 흠.. 나처럼 집에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절대 소수 (나혼자) 고, 주위에 가깝게 지내고 자주 보는 한국 사람도 없고, 같이 놀 수 있는 한국 아이들도 없으면.. 아무래도 아이들의 한국말이 더이상 늘기는 무리가 아닐까 하는 아주 불안한 생각이 들고 있는게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일단은 계속 아이들에게 '내 말 따라하기'를 반복해서 시키고, 내게 한국말로 할 걸 계속 요구하다가, 지인 분께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만 5-6살이 되면 한국말로 안하면 대답을 안해주거나.. 아이들이 좀더 크면 한국으로 여름학교를 보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혹시 다른 방법 추천해주실 분??
덧.
1. 얼른 내 스페인어 실력도 빨리 늘려야 한다. 아직까지는 아이들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내 아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아찔하니까;;;
2. 문법책이나 단어책을 끌어안고 다니면서 '공부'로 배우는게 아니라, 자연스레 같은 생각을 다른 '형태'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니. 이래서 언어교육이 어릴 때부터 중요하다고 하는건가... 그렇지만,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언어를 빨리 습득할 수 있다고 하니, 일부러 초조하게 아이를 언어'공부'에 시달리게 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면 최소한 부모부터 그 언어를 자연스레 말할 수 있을만큼 습득한 다음에 하라고 하든가... 공부는 나눠서 같이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