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책읽기

[캐비닛] 내안에 숨겨둔 캐비닛을 기어코 꺼내 보게 만드는 이야기

민토리_blog 2016. 1. 28. 22:51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선거로 반장이 되었는데, 선생은 차별하기로 유명했고, 자기 맘에 들지 않는 학생 (내)가 반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사사건건 시비도 많이 걸고, 날더러 엿먹어보라는 듯이 일들을 내게 떠맡기는 경우도 많았다 (꼭 종례때가 되면 사라져서 안나타난다던지, 야간자습 때도 애들이 떠들던 말던 나타나지도 않다가, 반이 통제 불능이 되면 그 때야 나타나서, '반장, 넌 애들도 조용히 안시키고 뭐했어!' 하고 날 나무라는 식..)


학교 생활에 그다지 애착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모범생인듯 보이고 성적만 좋으면 선생들도 건드리지 않았기에 나름 무난하게 학창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고 2때 부터는 학교가 끔찍하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교문 앞에서부터 혹시 담임을 만나게 될까봐 심장이 미칠듯이 뛰고 당장 뒤돌아서서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내가 그러든 말든 십대의 청춘을 즐기며 자습시간이든 언제든 마음껏 떠들고 노는 반애들이 미쳐버릴만큼 싫기도 했다. 선생이 신경쓰지 않으니 자연스레 반아이들은 내게 뭔가 주문을 하기 시작했고, 야간 자습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다가 주위가 소란스러워지면, 어떤 아이들은 내게 쪽지 등을 보내서, '반장,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가 안돼. 애들 주의 좀 줄 수 없어?'하고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얘들아, 우리 조용히 좀 하자' 그러면 그 때만 살짝 정적이 감돌고, 어떤 애들은 '치, 지가 뭔데'하면서 다시 수다떨기에 바쁘기도 했다. 청소시간에도 선생이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반은 개판이 되고, 그렇게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선생은 종치기 10분전에 불시에 들어와 학급 상태를 보고 화를 내며, 또 다시 '반장은 뭐했어!'하고 내게 소릴 질러댔다. 그래서 나중에는 청소시간이든 자습시간이든, 내가 앞서서 청소를 주도하고 거의 청소를 하다시피 하고, 선생대신 앞에 나가 단상에서 아이들 감시(!)를 하며 공부같지도 않은 공부를 하고... 그리고 그 해 봄에는 내 생모가 죽었다. 그 후 일주일간은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한체 쉬는 시간마다 엎드려 울었고, 여름에는 '차렷 경례'를 한 후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 선 체 울었을 만큼 허리가 아파왔다. 그렇게 끔찍하던 일년.


그 일년 중 어느 날에 일찍 청소를 (거의 혼자) 끝내고서 견디지 못해 학교 뒷산으로 간적이 있었다. 학교 뒷산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밑에 편평한 돌이 있었는데, 길이 난 곳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 오지 않는 한적한 공간이였다. 거기에 앉아 눈을 감으니 주위가 조용해졌다. 바람은 적당히 시원했고, 속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라기를, 제발 내가 눈을 뜨면, 환타지 소설/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주위가 변해있기를... 내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저 끔찍한 교실이 아니기를...

그러다가 오후 수업 종소리를 놓쳐버렸다.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해서, 혹시나 하고 눈을 떴을 때 실망스럽게도 달라진건 없었고, 내 시계는 내가 수업시간에 20분도 넘게 지각했음을 알려줬다. 그것도 담임의 수업시간에.. 미친듯이 뛰어 내려가 반에 들어가니, 담임이 단상 앞으로 나오라고 불러세웠다. 담임은 의외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도대체 뭘 하다 이제왔냐?' 라고 물었다. 뭐라 대답할 말도 없어, 그저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는데, 담임이 계속, 그래서 뭘하다 이제 온건지 말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답답해서, 그래서 뒷산에 바람쐬러 올라갔다가 바람이 너무 좋아 잠시 쉬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말이 끝나자 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담임은 이게 미쳤냐며, 학습일지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이런 기억들이, 김언수의 책, 캐비닛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을 떠돌았다. 


"그때가 아마 10월이었을 것이다. 수업시간에 나는 창밖의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이 10월의 은행나무 잎사귀들을 둘둘 말아 하늘 높이 올려보내고 있었다. 은행잎들은 회오리바람의 형상을 따라 빙글빙글 돌면서 국기게양대보다 더 높이 치솟아올랐다. 팽이의 가파른 회전처럼, 토성의 띠를 이루는 얼음 알갱이들처럼 은행잎을 매달고 빙빙 도는 바람의 모습은 놀라웠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때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바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하고 감탄사를 질렀다. 그때 해골처럼 깡마른 얼굴과 물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피부 때문에 실리카겔이라는 별명을 가진 윤리선생이 나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뭘 보고 있었냐?" 나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은 소년의 인생에 몇 번 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도 내 마음을 알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회오리바람이 은행잎을 둥글게 감아올리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웃었다. 실리카겔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실리카겔은 "이 새끼가 돌았나"하고 말했다. 실리카겔은 시계까지 풀고 내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뺨을 맞는 얼굴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너무나 창백하고 슬픈 것들이 목구멍으로 복받차올라왔다.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 우아악! 우아악! 우아악! 이렇게" (p. 220)


"불행은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p. 164)


캐비닛의 주인공이 우아악, 소리를 지르고, 일시불로 찾아온 불행 앞에서 몇달간 캔맥주 마시기로 나름의 저항을 하고 있을 때, 난 그저 견뎠다. 담임이 학급일지로 내 머리를 반복해서 내려치고 있을 때에도, 몇몇 아이들이 내 뒤에서 "반장 또라이 아냐?" 하고 수근댈 때도, 생모가 갑작스레 죽어버렸을 때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견디고 견뎠다. 어느 아침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엄마를 붙잡고 '제발 오늘 학교에 안가면 안되냐고' 울며 매달렸는데, 엄마는 그저 당황한 얼굴로 무슨 소릴 하는거냐고, 학교를 왜 안가냐고,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늦었으니 얼른 나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다시 도살장 끌려가듯 그것도 내 두 발로 교문을 들어서야 했을 때.. 그렇게 내가 또 죽어버린 기분이였다. 뭐 그래도 다행이라면 시간은 내가 멈추지 않는 이상 알아서 재깍재깍 흘러갔다는 거고, 그 영원할 것 같은 한 시간, 하루도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거다. 


책 캐비닛은 그런 우울하고 끔찍해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가슴 저 구석 깊은 곳에 있는 '캐비닛'을 꺼내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게 어디서나 있을 법하다는냥,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이미 증명 혹은 연구된 적있는 주제인 듯, 그래서 당신이 겪고 있는게 그리 낯선 것도, 당신만의 어두운 면도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해준다. 물론 읽는 내내 혹시라도 이 태연하고 의연해보이는 주인공이 짜잔, 하고 히어로로 둔갑해서 심토머라 불리는 이 사람들의 문제 혹은 상처를 해결해주진 않을까, 하고 기대하긴 했지만.. 현실이 그렇듯, 아무 것도 해결되어지는 건 없었고, 심토머들은 그들 나름의 비밀/상처 등을 안고 여전히 살아간다. 그리고 주인공을 기다리는 것도 해피엔딩은 아니다. 


참 읽기 편하고 재미있게 쓴 글임에는 분명한데, 글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복잡했고, 생각이 많아졌고, 읽고나서는 나만 그런 시간들을 보내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안도했고, 여전히 그런 시간들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들이 생각나서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었다. 


만약 견디기 힘든 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속은 답답함에 풍선처럼 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데 어떻게 내뱉아야할지 몰라 도리어 입을 꾹 다물고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혼자 있는 시간에는 눈물도 안나오는 헛울음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외로워서 미칠 것 같지만 내미는 손마다 외면당하거나 내쳐져서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만 동시에 증오하게 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제발 누구든 날 도와줘, 내 말 좀 들어줘, 하고 소리없는 비명을 안에서 지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그랬듯, 당신도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이라도 잠깐의 위안을 받을 수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나면 혹시 모르지, 또 하루를 견딜 힘이 생겨날지도, 또 한번 희망을 가질 용기가 생겨날지도. 


덧.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이 아쉽다. 뜬금없이 책이 장르를 갈아타버린 듯한 느낌도 들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또 다른 어떤 결말이 있을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개인적으로 난 그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어떤 기본적인 예의와 따뜻함을 가진 그 주인공이 행복하길 바랬다. 아니, 최소한 그만은 그냥 그자리에 계속 있어주길 바랬다. 그렇게 그 아무 할 일도 없는 연구실에 출근해서 갈 곳 없어 연락하는 이들의 전화를 받아주고, 때로는 퉁명하더라도, 그냥 그렇게 있어주길 바랬다. 사랑도 하고, 멀쩡한 삶도 꾸려가고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가 마지막에서처럼 고통을 받을 일은 없길 바랬다. 감정이입이 많이 된건지, 아니면 마치 그가 안그래도 인생이 괴로운 이들의 대표자라도 된 듯, 그가 괜찮으면, 혹은 행복해지면 왠지 '그래, 아무리 힘들어도 괴로워도 그다지 나쁠 것 없지'하고 위안을 받고 싶었던건지... 또 한편으론 그렇게 돈과 권력으로 무장한 거대한 세력앞에 개인은 얼마나 약한지, 새삼 깨닫게 되서 씁쓸해지기도 하고.. 우리는 그냥 각자의 삶을 어떻게든 열심히 살고 싶은건데, 왜 가끔은 그것조차 그리 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