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가 다는 아니다
최근에 남편과 저녁에 함께 BBC 다큐멘터리 'Secret of China'를 보다가, 프리젠터의 질문에 중국인 변호사가 중국어로 대답하는 걸 보고는 남편이 무심결에 말했다. '저정도 공부했으면 영어는 당연히 해야하는거 아냐?'하고... 그 말에.. 흠.. 뭐랄까.. 살짝 울컥해서 "영어가 지적 수준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니야!"라고 약간 정색해서 대답했다;;
어제는 밤에 잠들기 전에 한국웹툰을 잠깐 봤는데, 거기서 주인공의 지인이 다니는 회사에서는 존칭을 생략하기 위해 다들 영어이름을 만들어쓴다는 얘기가 나왔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용도 아니였는데, 이상하게 다보고 나서 그 부분이 맘에 남는거다;;; 그래서 이렇게 주섬주섬 잠깐의 짬을 내서 써보는 영어에 관한 이야기...
1. 영어는 그저 소통의 한 수단이다.
처음 영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학연수 기간과 유학시간의 초기), 나를 화나게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자면, 내 피부색, 생김새 때문에 차별받았을 때와 내 영어때문에 무시 받았을 때가 가장 많았다. 인종으로 차별받는거야 '그래, 네가 이 영국동네 바닥을 못벗어나봤구나' 하고 나도 혀를 차고 넘어가면 상관없다치지만 (물리적인 해가 가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영어로 차별받는건 정말 상대방에게 화가 남과 동시에 내 못난 영어싪력에도 화가 나게 된다고 할까.. 그래서 미친듯이 영어공부를 하기도 하고, 발음도 교정하려 들고, 나보다 영어를 좀 못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나름 우쭐함도 느끼고... 언어는 확실히 쓰면 쓸수록 느는 거라서.. 유학생활 2년차에 들어설 때는 확실히 영어도 늘었고, 영국인과 농담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게 끝이 아니였다.
어느날 다른 외국인 학생들과 영국인 가족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워낙 International students들을 대하는데 연륜이 있으신 분들이라 그랬겠지만, 말도 유달리 천천히 또박또박 하시고, 약간이라도 어려운 단어다 생각하시면 가끔은 어원까지 들어가면서 설명해주시고.. 물론 자상하시고 친절하신 분들이라 내가 거기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죄송할 정도였는데, 밥을 먹기 전에 두분께서 눈을 부릅뜨시고 우리가 포크와 나이프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지켜보시다가, "In Britiain, we use forks and knives like this..."하고 말문을 여셨을 때, 그 때서야 내 마음속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며 그 불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난 그런 식으로 '어린애' 취급을 당하거나, 내가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인냥 취급 당하는게 싫었던 거다.
그러니까 '영어'를 잘 할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영어가 모국인인 외국인과 같은 수준으로 영어를 받아들이고 사용하긴 힘들다. 그 나라에서 자라고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모르는 언어들이나 문화같은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자연스러운거지, 그게 내 지식의 척도가 될 순 없다.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내 감정이나 지식을 말로 표현못한다고 해서, 내가 그 감정을 느끼지 않거나, 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아니니까.... 실제로 내가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습득한 지식들 중 어떤 건 한국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모르는 것도 많고, 그 지식들의 범주를 넘어선 것들 (내 경우 특히 육아와 관련한 것들)을 영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또 상황이 닥쳐서 배워야 비로서 그게 내것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영어는 그냥 다른 언어다. 어쩌다보니 지구상의 많은 인간들이 쓰고 있는 언어 중 하나라서 (첫째는 중국어, 둘째는 스페인어, 셋째는 영어), 알아두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인종, 국적을 떠나서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확실히 매력적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지식의 척도'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싶다.
2. 영어 이름을 꼭 만들 필요가 있을까..
예전에 한국에서 어학원을 다닐 때도 그랬지만, 'Free talking' 수업에 들어가면 아주 당연한 듯이 첫번째 과제가 '영어이름 지어오기'였다. 그럴 때마다 난 뭘로 이름을 지어야 할지 늘 고민하다가 그냥 내 한국이름의 영어버전을 만들어 내곤했다 (그럼 꼭 선생님이 뭐 그런 이름을 쓰냐는 듯한 표정으로 보거나, 아니면 다른 흔한 영어이름 아무거나 지으면 안되겠냐고 설득하기도 했다;;). 유학을 와서도 영어이름을 만들어 내기가 싫어서, 차라리 한국 성치고 좀 특이한 내 성을 이름처럼 소개해서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나마 그러던 것도 박사과정을 마침과 동시에 때려치우고 그냥 내 이름을 썼다. 내 한국이름은 받침이 둘다 들어가 있어서 한국사람들도 한번 듣고 살짝 헷갈려할 정도이긴 하고, 영어발음으로는 잘 되지 않는 '으' 사운드가 들어가 있어서 늘 여기 사람들은 내 이름을 한번 듣고 당황스런 표정을 짓긴 하지만, 이젠 신경쓰지 않는다. 일하는 곳에서처럼, 필요가 생기면 그 사람들은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도록 노력하게 되어있고, 그 외 사생활에서는 나와 왠만큼 친분이 생긴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내 이름을 정확히 말하도록 노력해 주니까...
그리고 영국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깨닫게 된 건데, 한국 이름을 제외하고서라도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은 아주 특이하고 때론 복잡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저 철자만 보자면 도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상상도 안되는 이름부터, 보는 것과 듣는 게 아주 딴판인 이름들, 길고 길어서 읽다가 벌써 이름의 반을 까먹게 되는 이름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이름들 중에 특이하게도 동양권의 사람들만 '영어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다. 그냥 원래 이름의 애칭처럼 줄인 이름도 아니고, 자신의 원래 이름과는 전혀 딴판인 아주 흔한 영어식 이름을.... 우리는 너무나도 예의바른 사람이라, 상대방이 내 이름을 듣고 힘들게 발음하거나 외울 수고를 덜어주려는 배려일까? 아니면 새로 '영어식 자아'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일까?
다른 영어권 지역은 어떨지 몰라도 영국의 이름들을 보자면, 이름은 흔한데 보통 성이 좀 특이한 경우다. 그래서 한 반에 John, David, Paul, Mat, Jane, Sarah, Emma 등이 여러명있어도 성으로 구분되어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명이인은 많이 존재하지만..). 그런데 한국이름은 흔한 성이 꽤나 많아서 이름으로 구분이 되어진다 (물론 역시 인기있는 이름은 꽤나 많이 쓰여서 구분이 힘들어질 때가 있지만...). 그러니, 그토록 흔한 영어이름에 한국에서 흔하다는 김, 박, 이, 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면, 왠지 정체성이 좀 흐릿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이건 아주 사소한 내 걱정인데... 그렇게 여자 같은 경우, 영어이름을 쓰다가 외국인을 만나 결혼이라도 해서 그 쪽 문화대로 성을 남편 성으로 바꾸게 되면.. 왠지 문서상으로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좀 슬플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어차피 결혼을 하든 말든 내 성을 바꿀 생각이 없었지만, 스페인에서도 결혼을 하면 여자가 성을 바꾸지 않고,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하나씩 물려줘서 이름을 지어주기 때문에 그런 쪽의 걱정은 덜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은 남편의 성과 내 성을 하나씩 써서 성이 두개다. 아이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또 아버지의 성만 물려주게 되는데, 은근한 내 바램으로는 아들은 남편의 성을 자기 아이에게 물려주더라도 딸은 내 성을 물려줘서 가능하면 내 한국 성이 한대를 더 이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러다가 내 자손들 중 여자아이들은 모두 내 한국 성을 물려 주게 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훗!)
어쨌건.... 조심스레 말하자면... 영어이름을 짓기 전에 살짝 주저해봤음 좋겠다. 도대체 왜 영어이름이 필요한지도 생각해봤음 좋겠고... 한국 이름이 발음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나란 사람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데, 인간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그 정도 수고쯤은 해줘야 예의가 아닐까? 그리고 상대방이 발음하기 힘들어하면 천천히 가르쳐주면 된다. 뜻도 가르쳐 주면서.. 그럼 그 사람도 한국의 문화에 대해 하나는 더 배우지 않을까.. 그리고 당신을 그 뜻과 더불어 더 기억할 수도 있고? 안그래도 특별해지기 힘든 세상인데, 이미 정해진 특별한 내 이름 만큼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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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생활을 얼마 해보지 않으면, 뭐랄까.. 외부에서 바라보기에는 좀 재수 없어 할 수 있는 과도기를 걸치게 된다. 적게는 6개월/1년에서 좀 오래는 3년 정도까지.. 한국에 들어가면 달라진게 막 보이고, 저절로 비교가 되고(보통 '한국은 왜이래?' 하는 방향이 많음;;), 가능하다면 '나 외국에서 살다왔음'이란 표시를 이마에 부치고 다니고 싶을 만큼 티를 내고 싶고, 영어를 쓸 수 있는 모든 찬스를 없더라도 만들어 내고 싶고, '나 외국물 먹은 세련된 사람'이란 아우라를 막 풍기고 싶어할 수도 있다. 나역시 유학생활 초기에는 1년에 한번씩 한국에 돌아갈 때, 공항에서부터 긴장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영어를 까먹을까봐 일부러 영문 소설책을 챙겨가고, 한국에 도착해서도 처음 오는 곳에 온냥 긴장해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그새 바뀐게 있어서 상대방이 날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면 (예, 화폐 바꼈을 때, 진심 깜짝 놀랬음;;), 괜히 외국에 살고 있다는 상대방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고, 간만에 보는 한국티비에 정신줄 놓고 보다가 갑자기 영어를 까먹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긴장감에 BBC 채널을 틀어놓기도 하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외국인을 보게 되면 왠지 말을 걸어서 '나 이렇게 영어하는 사람이야'하는 티를 내고 싶기고 하고.... 그런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도 낯뜨거운 시기를 지나왔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한국에 가면 도리어 외국생활 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말한다.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백반이라든지 감자탕이라든지 그런 것만 먹고, (제일 가기 싫은 곳이 파스타집, 샐러드바.. -_-;;) 한국작가들이 쓴 책을 열심히 구해서 읽고, 몇권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을 수 있게 챙겨두고, 습관처럼 나오는 'Thank you'와 'Sorry' 대신에 좀 뜸을 들이더라도 꼭 '고맙습니다',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말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한국에 있는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길 준비가 되었다고 할까... 영어에 대해 초조함이 생기지도 않고,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특별하거나 대단한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한국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이 그립고, 한국에서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타지생활이 길어질 수록... 내게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아주 강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왠지 이 원래 내 고향이 아닌 낯선 땅에서, 원래 내 언어가 아닌 다른 말을 쓰며 살면서 나란 사람이 원래 어떤 사람이란걸 잊지 않게 해주는 강한 닻 같다고 할까. 요즘에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정착할 내 집을 갖게 되면, 거실은 한국식으로 꾸미고, 정원에는 마루를 두고, 계량식 한복을 입고 다니고 싶다고, 그게 어느 나라, 어느 곳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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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다가 뭔가 좀 거창하고 감정적이 된 듯하다. 그저 하고 싶었던 말은... 영어가 인생의 폭을 넓히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거나 여행할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는 건 사실이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가 정도가 좀 다를 뿐 다 그런 역할을 한다), 그런 현실적인 필요를 넘어서 그게 당신의 지적 수준이나 성취도를 결정짓는 건 아니라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굳이 외국의 것을 따라 써서 내 본연의 특별함을 감추는 대신, 그냥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그 자체로도 괜찮다고. (예를 들어, 한국 이름에 따라 붙는 존칭으로 인해 딱딱해지는 회사 문화를 좀더 평등하게 바꾸고 싶다면, 그냥 다들 이름 뒤에 직함 대신 '님'자를 붙여 부르면 안되는건가? 아님 아예 온라인 게임처럼 닉네임을 만들던가. 그렇게 만든 닉네임이 흔한 영어이름보다는 훨씬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해줄 것 같은데?)
덧..
뭐.. 하긴 이런 소릴 내 멋대로 하긴 했지만, '영어'를 필수스펙으로 생각하는 한국 문화가 바뀌지 않는 이상 어림없는 일이겠지... 그래, 영어를 '스펙'으로 두고 점수를 매기고 있으면, 영어 수준으로 상대방의 지적수준을 가늠하는 것도 못할 일은 아니지.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점수화 시키는 문화, 언제쯤 바뀔려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