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과거로 묻어두자
최근에 연애를 시작해서 한창 깨를 볶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그런듯 아닌듯 현재 남자친구에 대한 자랑을 살짝 하고 최근의 데이트 장소와 선물 목록도 한번 훓어준 후에, "이 남자는 이래서 더 맘에 들어. 저번의 그 남자는 내가 이런거 하자고 할 때마다 시큰둥했는데 말이야" 하고 예전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예전 남자친구와는 6개월 이상 지속된, 그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그의 가족들까지 소개받은 꽤나 깊이가 깊어보였던 사이였는데, 그녀가 그의 단점들을 덮을만한 장점 찾기를 포기하면서 관계가 끝이났다. 예전의 남자친구는, 그녀가 던져준 정보들을 종합해보자면, 서른 후반의 나이인 싱글이며 약간의 공대생 끼가 다분한 어찌보면 좀 쑥맥인 남자였다. 재치있는 선물을 할 줄도 잘 모르고, 그녀의 감정적인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침묵하고 마는.... 그렇지만, 그는 다소 수다스럽고 자상하며, 그런 그의 쑥맥같은 모습들에도 실망하기 보다 인내를 가지고 보듬어주는 그녀의 (처음) 모습에 꽤나 반해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한 후에도 그가 상처를 받을까봐 말하기전에 최소 한달을 고민했고, 막상 관계를 끝내자고 했을 때, 그가 너무나도 상처받고 충격받은 모습이라 다시 며칠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물론 그러다가 그의 약간의 술주정을 동반한 매달림에 죄책감은 창밖에 던져버리고 아예 연락을 끊어버렸지만.... ;;
그랬는데, 그녀가 현재 남자친구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그 예전의 남자친구를 언급하며, "안그래도 잘지내냐고 연락해볼까 생각중이야" 그러는거다! 거기에 순간적으로 내가 "No, Don't" 하고 대답했는데, 내가 너무나도 단호했는지, 그녀는 약간 기분이 상한 목소리로 "왜?" 하고 물었다.
아니, 왜는 무슨 왜야. 그렇게 상대방의 마음에 칼자국 내면서까지 끝내기로 했으면 한거지, 그리고 그렇다고 다시 잘해볼려고 연락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도대체 왜 이제와서 연락을 하려고 하는건데? ... 하는 모든 생각을 일단 내 속에 묻어두고, 다시 차분하게, "Why do you want to contact him?"하고 되물으니, "Well, you know, just wondering how he's doing, and we can always become good friends together" 한다. 진짜... 국적을 떠나 이 대답은 똑같구나... -_-;;;
또, 최근에 페이스북에는 또 한명의 친구가, "OO (Ex name), it reminds me of you"하면서 사진을 하나 첨부해서 올렸다. 이 친구 역시 여기에 언급한 예전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벌써 3년이 넘어가고, 지금은 현재 남자친구와 동거 계획까지 하고 있는데... 대놓고 페이스북에 예전 남자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도대체 왜???
그녀를 거의 10년동안 알아온 입장에서는, 사실 '아이고, 또 여왕벌 증후군이 도졌구나'하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참... '왜 그랬니, 왜 그래야 했니'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녀가 말한 예전 남자친구는 그녀를 사랑(Love) 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거의 신봉하는 수준이였고, 심지어 애칭도 "My Goddess"였다. 물론 이 관계도 그녀가 먼저 끝을 냈고, 그는 그 사실로 인해 panic attack까지 올 정도였다 (그녀와 내가 속한 친한 여자친구들 그룹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이 남자친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별 후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동정심으로 인한 친근함마저 생겨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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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낸 사람들이 시간이 지난 후, 난데없는 죄책감이랄까, 궁금함이랄까, 그런 감정들로 다시 과거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할 때가 있다. 그 때 내가 세상의 중심인냥 그토록 나를 위해 살아주고, 사랑해주던 그 사람, 내 모진 말에도 날카로운 행동에도 여전히 나를 보듬어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그 사람. 지금은 어떻게 지낼까, 지금은 나를 잊었을까, 지금은 누구와 만나고 있을까, 여전히 나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그 때 내가 참 나빴는데...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등등등....
어떤 이유를 대든, 핑계를 대든, 연락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난 개인적으로 '그만하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토록 상처를 주고 헤어졌다면, 그냥 그 사람 인생에서 없어져주는게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다 자기 위안이다. 미안했다고 말하고, 용서라도 받으려고? 상대방이 어찌어찌 받아줘서, '난 이제 괜찮다. 다 잊었으니까 너도 네 삶 찾아가라' 라고 말하면, 또 거기에 왠지 서운해질거다. 난 이제껏 자기 생각하면서 죄책감도 들고 했는데, 날 그 당시의 나보다 더 사랑해줬던 그 사람은 이미 나를 잊었구나, 난 그 때 그 사람의 사랑을 외면한 것 때문에 이렇게 나름 미안해하면서 살았는데, 내가 이제 그 사람에게 아무 존재가 아니구나, 싶어서 왠지 서운하고, 심지어 심술이 날 수도 있다 -_-;;
사랑을 아낌없이 줘버린 사람은 지나간 관계에 대해 별로 미련이 없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렇게 사랑을 외면하고, 적당하게 발을 넣고 있었거나, 심지어 그 사랑을 내 편의를 위해 이용하기 까지 한 사람은 나중에 지나간 관계를 생각하고, 때론 후회하고, 때론 다시 그 사랑받던 느낌을 되새김질하기 위해, 다시 추억여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친구가 되고 싶다'라고? 내 경험상 이성간에 진짜 친구로 남으려면, 아예 둘 사이에 과거가 없거나, 둘 사이에 정말 눈꼽만큼의 감정의 빚도 없고, 현재의 연애 상대자들에게도 완벽한 이해를 받을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적어도 위에서 말한 내 두 여자친구들이 예전 남자친구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 고 말하거나 한 행동은, 그런 진짜 친구관계를 위해서라기 보다 '찔러보기'에 가까웠다. 너 아직 내 생각해? 내 이런 행동, 말 들에 다시 설레이니? 하는 찔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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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봐야, 내 연애사도 아닌데, 누가 찔러보기를 한들, 돌려치기를 한들, 꺽어내기를 한들 뭔 상관이랴. 이렇게까지 흥분(!)해서 글 하나를 뚝딱 적어내려가고 있는건, 분명 내게도 찔리는게 있기 때문이겠지. 어린 시절, 사랑을 줄 줄은 잘 모르면서, 받는다는 그 느낌에 취해서, 내심 모르는 척 아닌 척 하면서 수없이 상처냈던 진심들이 생각나서. 철이 약간 든 다음, 죄책감에 시달려 어설프게 손내밀었다가 둘다 이도저도 아닌 시궁창에 빠져서 결국은 서로 다시 상처만 주고받았던 일들이 생각나서.
진짜.. 사랑할 땐 정말 열심히 하자. 그리고 사랑이 아니면 솔직하고 단호하게 끝을 내고, 그 사람 인생에서 확실히 빠져주는 것도 배려일 수 있다. 무엇보다, 지나간 과거는 그냥 과거대로 놔두자. 이미 식을만큼 식어버려서 다시 뭘 어떻게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을테니까... (물론 과거라도 그걸 현실로 만들고 싶을 만큼 절절하다면 다시 최선을 다해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