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서 다행이다
예전에 첫째를 임신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임신기간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특히 첫째를 임신했을 때가 진짜 힘들었다. 사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유를 알 수 없이 거의 2주동안 처음엔 몸살인가 하다가 감기도 아닌 것이 몸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그럼 병원에 가보자, 하다가 문득 생리주기가 꽤 지난 것 같아 병원에 가기전에 테스트나 해보자, 하다가 알게 된 것처럼, 임신 초기에는 몸이 너무 너무 아팠다.. 임신 5주가 시작되자 마자, 누가 스타트 라인이라도 끊어준 것 처럼 입덧이 시작됐고, 내 몸 전체에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된 것처럼, 뭘 해도, 뭘 먹어도, 아무 것도 안해도, 전혀 편하지 않은 느낌...
그렇게 매일을 비실비실거리던 어느 날 아침에 고막을 뚫고 머리를 뒤흔드는 화재경보기 알람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었다. 안그래도 매일 두통이 심한 상태였는데, 자다가 덜깬 상태라 머리가 흔들리고 빈 속에 구역질까지 몰려와서, 제발 저 소리 좀 어떻게 해달라고, 아래층에서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을 소리질러 불렀다. 남편은 놀라 올라와 화재경보기를 떼내서 건전지를 뽑아버리고, 화장실에서 변기와 아침 미팅 하던 내 등을 두드려주고, 다시 날 침대에 눕혀줬다. 골골거리는 날더러 좀 더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고, 문도 닫아주고 그렇게 남편은 출근을 했다. 그리고 얼마쯤 지났을까... 살짝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거다. 그게 현관문 소리라는걸 인지하는 순간부터 몸은 못 움직이겠는데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분명 남편은 출근했을텐데, 이 시간에 누구지? 누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우리집이 확실한가?.... 그러다 아래층에 사람이 있는 기척이 들리고 계단을 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온몸이 굳어버리고 신경이 곤두서다 못해 경직된 몸을 뚫고 나올 지경이였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건, 다행이도 그리고 놀랍게도 남편이였다. 11월의 추운 날씨에도 남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심지어 이마에는 땀까지 맺혀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서 몸을 살짝 일으키며 왠일이냐고 물으니, 남편은 안도했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그냥 나를 안아주었다.
사정을 물어보니, 남편이 출근한 후 회사동료와 얘기를 하다가 아침에 화재경보기가 울린 일을 얘기했는데, 회사 동료가 그거 혹시 일산화탄소 경보기도 겸비된 거냐고 물은거다. 거기에 최근에 계속 문제를 일으키던 보일러도 생각나고, 일산화탄소 중독 증상 중 하나가 두통과 구토라는 것도 생각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을 내 생각을 하니, 걱정이 몰려와서 당장 집으로 달려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차로 왕복 1시간이 되는 거리를 그는 출근하자마자 다시 차를 몰고 집으로 달려왔고, 깨어있는 나를 보고 안도했다고 했다.
그 때 안도하던 그를 보고 난 살짝 웃음도 나오면서, 한편으론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 사람 정말 날 걱정하고 있었구나. 날 정말 생각하고 있구나. 계속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세상에 나하나 없어진들 그렇게 신경써줄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에게는 내가 정말 중요한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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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만났을 때, 남편은 나를 볼 때마다 빨간 경보등이 울리는 것 같았다고 했다. 'Danger, danger, she's crazy, stay away from her'하고 머리 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고.. -_-;; 실제로 그는 내게 거리를 두었고, 난 그가 날 싫어한다고, 아니 싫어하진 않더라도 내게 전혀 관심이 없으며 생기지도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를 보면, 저 사람과 커플이 될 수 없는 100가지 이유들을 당장이라도 A4 용지에 적어내려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랬던 우리가 지금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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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눌 첫째 꼬맹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다녀왔는데, 그 커다란 홀에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미친듯이 뛰어다니고 놀고 있는데 거기에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들은 남편을 포함 5명 정도였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이를 데리고 혼자 왔고, 그 중 친한 두 친구는 나처럼 아이가 둘인데 횬자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 남편은 어디 있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다수의 대답이 "He doesn't like a kid's party', 혹은 "He is probably watching a football match".... (누군 애들 파티 좋아서 가냐, 나도 가능하다면 집에서 티비보고 쉬고 싶다 -_-)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지금의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겨서 적어보는 글...
물론 그가 있어도 나는 가끔 외롭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이게 마지막일 것처럼 열을 내며 언성을 높이며 싸울 때도 있다. 가끔은 정말 그가 이해 안될 때도 있고, 가끔은 정말 그가 날 이해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속상하고 서운할 때도 있다. 그래도, 그라서 다행이다. 내 남편이,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그라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