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녀석이 찾아왔다
그녀석이 오고 있다. 슬금슬금... 처음에는 그저 밤에 잠이 잘 온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서 알았다. 아, 이녀석이였구나. 이 우울증 녀석...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한다. 내 안에 감정 창고가 있다. 가득차 있던 감정들이 내게서 빠져나가면 창고가 서서히 비게 되는데, 그 레벨이 위험한 수준으로 내려가기 전에 알아서 채워놓지 않으면, 그 때는 우울증 녀석이, '어라? 비었네? 그럼 나랑 놀까? 하고 슬쩍 찾아오는거다.
사람과 주위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같은 경우, 사람들을 만날 때 감정 소모가 꽤나 큰 편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감정을 전해받아 내 창고를 채우는 식이면 그다지 문제될 게 없는데... 안타깝게도 원래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외향적이지 못했던 성격때문인지 적당한 선에서는 이런 식의 감정교환으로 인한 충전이 가능한데, 이게 어느 선을 넘어서게 되면, 그 땐 사람을 만나는게 충전은 되지 않고 소모만 되는거다. 그래서 그럴 때에는 보통 혼자 잠수를 타거나 하면서 채우는 편인데, 그게 가능하지 못한 상황이 오면 몸에서 가시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우울한 녀석을 친구삼아 바닥을 치고서야 다시 올라온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어떤 사람은 먹는 걸로 풀고, 어떤 사람은 수다떠는 걸로, 또 어떤 사람은 잠을 자면서 푼다는데, 나 같은 경우는 그냥 혼자 조용히 뭐든 하는 편인거다. 혼자 책을 읽거나 무작정 혼자 걷거나, 뭘 만들거나.. 다만 조건은 뭘해도 좋은데 대화를 포함한 다른 사람과의 어떤 직접적 접촉도 하지 않는것. 참.. 반사회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지만,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찌하랴..;;;
이렇다 보니, 결혼을 하고 나서, 특히 아이를 가지고 나서부터 우울증 녀석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내 속에서 나온 내 살과 피 같은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나와는 다른 인격체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감정소모가 꽤나 크다. 특히 아이들 같은 경우는 별 반응이 없는 갓난 아기인 시절에는 상호관계라기 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이기 때문에 특히 더 힘들었다. 감정 창고는 비어가는데, 혼자 뭘 할 공간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거다. 그러면 유일하게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남편에게 날을 세우고, 그러다가 우울증 녀석과 함께 자폭하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가라앉았다.
물론 아이들이 좀 크면서 부터는 (그래봐야 고작 1살, 3살..) 아이들이 있다는 현재의 상황에 익숙해져서 그걸로 굳이 감정의 소모를 겪는 일은 줄어들었는데, 그래도 가끔씩 생일이라든지, 휴가라든지, 그런 식으로 평소와 다른, 좀더 밀도가 높은 감정이 요구되는 상황이 오면, 창고가 쑥쑥 비어가는게 느껴진다. 7월 초에는 남편과 둘째 아이의 생일이 거의 연달아 있어서 그전부터 준비를 한다고 신경이 곤두서있었는데, 6월말에 남편의 출장이 겹쳐지면서, 감정 인벤토리 레벨이 나도 모르게 확 하고 내려가 버린 듯 하다.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자고, 낮에도 멍하고 답답한 기분이 계속되고, 신경이 곤두서고, 그냥 무작정 떠나고 싶어지고,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기분이 가라앉고, 과거가 그리워지고, 얼른 다시 복귀하고 싶고 (이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면서!), 그러다가 아이들 얼굴을 보면 미안해지고, 그러다가 죄책감에 다시 우울해지고, 이런 상태의 무한 반복.....
그러다 급기야 금요일에는 남편에게 "우리 어디 호텔에 가서 하룻밤 쉬다 올까? 그냥 아이들 데리고 루틴같은 거 신경쓰지 말고, 밥도 아무거나 먹고, 같이 침대에 앉아서 티비도 보다가 피곤해지면 9시든 10시든 다같이 한 침대에서 자는거야. 어때?" 하고 문자를 보냈는데... '뭔소릴 하는거야?' 하고 의아해하거나, 즉흥적인 내 제안에 이의를 제기할 줄 알았던 남편이 그냥 "OK, if that's what you like. Where should go?"하고 답을 보내온 거다. 그런데 그 답을 보고 좀 김이 새는 느낌이랄까 ㅎㅎ 김도 새면서 그동안 날서있던 내 가시도 좀 뽑힌 기분? 그 후 남편은 실제로 괜찮을 것 같은 호텔 등을 알아봐서 내게 리스트를 보내왔지만, 결국 우린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동조를 해주니 별로 가고싶지 않아졌다고 할까 ㅎㅎ (변덕스런 내 성격 탓이다 허허 -_-) 대신 꼬맹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고, 그러고 나니 창고가 살짝 채워진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이 우울한 녀석이 미련을 못버리고 내 곁에서 머물고 있는게 느껴진다. 때때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게 속닥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이 좀더 걸릴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 내 아이들은 우울한 녀석보다 큰 목소리를 낼거고, 남편은 이제 내 곁에 있되 내 감정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어떤 적정선을 발견한 것 같다. 나쁘지 않다. 정말.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