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현실같은 현실이 아닌 세계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처음 접한건 아마 고등학교 때 였을거다. 친척집에 갔다가 책장 구석에서 잊혀져가고 있던 '상실의 시대'를 발견했고 그게 시작이였다. 나같은 경우 책을 읽고 그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작가의 책울 모조리 찾아 읽어보는 편인데, 상실의 시대를 계기로 그의 책을 닥치는데로 도서관에서 찾아 읽었었다.
하나에 빠지면 그것밖에 볼 줄 모르는 - 남편말을 빌리자면 obsessed한 성격때문에 보통 마음에 드는게 있으면 - 그게 책이든 그림이든 게임이든 - 그 끝을 볼 때까지 거기에만 매달리는 편인데, 그래서 그의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책 속의 세계에 거의 빠져살다시피 했다. 꿈도 이야기의 번외편같은 걸 꿀 정도로...
수능이 끝나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자유시간이 넘쳐 뛰어 날뛸 때, 그의 에세이 한권과 친구에게 빌린 클래식 음악 시디와 오빠 몰래 들고 온 시디플레이어를 들고 포항으로 가는 새벽 열차를 탄 것도 그런 이유였다.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였고,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의 책 내용이 뭐였는지도, 심지어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지만, 난 그의 세계에 상당히 빠져있었고, 그 글의 주인공들이 대게 그러하듯 혼자이지만 외롭거나 쓸쓸하진 않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클래식 음악은 그러기 위한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실제로는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고 굳이 찾아듣지도 않는 편이다). 그렇게 찾아간 포항의 바닷가는 추웠고, 추웠고, 정말 추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둣가 끝까지 걸어가서 그 끝에 걸터앉아 벌겋게 얼어붙은 손으로 구불구불거리며 들고간 공책에 글을 썼다. 최근에 한국 포털사이트를 보다가 새로 알게된 표현을 빌리자면, 중 2병의 끝판이였다고 할까 ㅎㅎ;; (그렇지만 난 지금도 혼자 다니는 여행이 부담스럽지 않고 여전히 공책 하나쯤은 늘 가방에 들고다니며 글을 쓴다, 물론 이젠 완전한 내 소유인 mp3 player도 있고)
이상한 건 그의 글을 읽을 때는 그렇게도 빠져있는데 막상 다 읽고 나면, 나중에는 도대체 그게 무슨 내용이였는지 기억도 못할만큼 잊어버린다는거다;; 제목을 보면, 읽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그게 무슨 내용이였는지는 모른다고 할까..;; 그래도 남아있는건 그의 글이 가지고 있었던 어떤 분위기. 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지 않고, 참 적절하게 쓰여진 표현들.. 그래서 난 여전히 그의 신작이 나오면 주저없이 읽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 세비야 여행전에 eBook으로 1Q84를 들고 갔고, 시도때도 없이 그 세계에 빠져 읽다가 또 이 느낌을 잃어버리기 전에 남기는 짧은 감상. (그런데 벌써 반은 또 희미하게 지워지고 있다;;)
1. 언젠가 또 인터넷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몰두하게 되겠지
2. 아오마메처럼 나도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들으며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문적인 스트레칭 기술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거겠지만.. (글로 쓰여진 묘사를 읽었을 뿐인데도,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근육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진짜 누가 내 뼈와 근육을 분리해서 비틀고 늘리고 조여준 뒤 다시 재결합해줬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3.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삶의 다른 필수요건에 대해 그리 걱정하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삶일거다 (그 필수조건이나 걱정의 범위를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일 순 있겠지만.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처럼 생활의 필수지만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생활의 모습에서 적정한 선을 유지할 수 있는건, 내 삶에 대한 독립성과 개인성이 보장될 때 가능할거다 - 내가 책임져야할 꼬맹이들이 있다면 그런 경계따윈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릴테니.... 부모가 아닌 이들아, 지금을 즐겨라!!!)
4. (스포일러 포함!!!!!!)
3번째 책의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난 책이 더 있는 줄 알았다. 3권에 들어서면서 왠지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1Q84세계에 지겨워져서 "자, 여기까지" 하고 적당히 포개서 치워버린 느낌이라고 할까. . 이제 슬슬 뭔가 한바탕 벌어져야 할 것 같은데, 주인공들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냉큼 다른 세계로 도망을 가서는 "좀 쉬자"하고 늘어져버리고, 남겨진 세계는 "이제 우린 어쩌라고?" 하고 벙쪄버린 표정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마지막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깁니다" 할 수도 있는거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좀더 같이 손을 잡고 가줬음 했달까....
4. 몇몇 일본 작가의 글은 유명해서 영어판으로도 구할 수 있는데, 이상하게 일어 소설은 영어로 읽기가 싫다. 일어를 모르니 한국어로 읽는게 최고, 다만 한국어로 된 글을 구할 기회가 되면 가능한 한국작가의 글을 구해오기 때문에 계속 밀리게 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 도서관에서 상실의 시대를 찾을 수 있다면 빌려 읽을 생각을 하고 있다.
6. 요즘에는 인터넷을 폰으로도 시도때도 쓸 수 있으니까 뭔가 읽으려면 읽을 거리는 넘쳐나고, 실제로도 틈틈히 뭔가를 읽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책"이라는 매체가 주는 느낌이 좋다. 물론 요즘에는 뭘 좀 읽을라치면 첫째 꼬맹이가 지 책을 읽어달라고 들고와서 조르고, 둘째는 염소마냥 책을 못먹어 안달인듯 덤벼들어 힘들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