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교육분위기
그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식의 교육이 중심이냐? 초등학교에 보내기 전에 시키는 조기교육이나 사교육 같은 게 있느냐? 영국에서는 어떤 인재상을 중요시하느냐? 거기도 외국어 교육을 따로 시키냐? 등등 이였죠. 그래서 총괄적으로 생각해 본 끝에 쓴 글입니다.
이미 여러번 포스팅을 통해 말씀드린 거 같은데... 영국의 교육 분위기를 말하기 전에 미리 생각할 건 영국의 전체적 사회분위기입니다. 영국은 아직 왕권이 건재한 만큼,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사람들의 말투나 행동, 옷차림에서 그들이 속한 계급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이 분명한 사회죠. 한국에서 대부분 부모들이 자식만은 자기보다 나은 삶을 살게 하고 싶어서 (높은 계급으로 올리기 위해) 교육에 열을 올린다면, 영국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계급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급간의 이동도 별로 없는 편입니다. 물론, 자신의 자식이 아주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면 그걸 자랑스러워하긴 하지만, 꼭 그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둥바둥 하지도 않는다는거죠. 이런 영국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은, 대학을 못나오거나 제대로된 직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uneducated person”, 즉, 교육이 덜된 사람입니다. 여기서 교육이 덜 되었다는 사람은, 무식하다는게 아니라, 행동이 성숙하지 못하고 무례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은 그들의 교육방식에도 대부분 그대로 반영되죠.
예를 들어, 처음에 아이가 학교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 아이가 알파벳을 떼었나, 숫자를 다 아는가, 하는 걸 보는게 아니라, 선생님 말을 잘 듣는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Please'를 말하는가, 요구사항이 충족된 후 'Thank you'라고 말하는가, 잘못한 걸 지적했을 때 'Sorry'라고 말하는가, 등을 먼저 봅니다. 그러다보니, 영국에서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런 식의 예절 교육을 먼저 시킵니다. 그런 후 중시되는건, 아이가 일정 시간동안 집중할 수 있는지,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이해하고 잘 따를 수 있는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 수 있는지 등의 주의력, 사회성들입니다. 그 외에 부모에 따라 미리 글쓰기나 책읽기, 숫자나 색깔 알기 등을 가르쳐서 보내기도 하지만, 그걸 못한다고 학교에서 주의를 받거나 놀림을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즉, 영국에서는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고 예의바르지만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학생보다, 산수에 능숙하고 2개국어를 하더라도 선생님에게 버릇없이 굴거나 다른 아이들을 때리는 학생이 더 문제학생으로 여겨진다는거죠. 그리고 영국의 학교에서는, 특히 Foundation Year, Year 1에서 6에 해당하는 만 4-11세의 아이들에게는 지식의 양적인 부분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고, 잘 측정하지도 않습니다.
만 4세 남자아기를 데리고 유학오셨던 한국분은 한국인다운 열의를 발휘해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속성으로 알파벳 익히기를 시켰답니다. 그렇게 입학 전에 'Apple'을 보면 '에이, 피, 피, 엘, 이'라고 읽을 수 있게 한거죠. 그런데 입학한 후 한달도 지나지 않아 담당 선생님께 전화가 왔더래요. 아이에게 알파벳을 따로 가르쳤냐, 라고 물으시길래 자랑스러워 하며 'Yes'라고 대답했는데, 의외로 선생님께서 그건 교육에 좋지 않으니 따로 가르치지 말라, 라는 대답을 받았답니다. 즉, 영국에서는 놀면서 자연스레 익히는 방식을 많이 쓰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가르쳐버리면 사고에 제한이 온다는 거죠. 실제로 영국에서는 아이들에게 ABC를 가르치는게 아니라, A는 Apple할 때 나오는 그런 발음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런 교육방식의 단점으로 성인임에도 철자를 틀리거나 특히 노동자계급에 속한 성인들은 문법에 제대로 맞지 않는 영어를 구사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국어에 해당하는 영어 외에 모든 교과과정의 필수인 수학과 과학 같은 경우에도, 공식의 암기라기 보다 공식의 배경이라든가 자연법칙에 대한 실제 체험 학습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그 외의 과목들은 대체로 학교마다 자유롭게 선택해서 가르치기 때문에, 그 이해정도나 지식의 깊이 정도가 출신 학교나 학력에 따라 편차가 큰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영국인 성인과 얘기를 하다가, 어떻게 저걸 모를 수도 있지,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지식의 양적인 걸 흡수하는 한국의 교육을 받은 대다수의 한국인 성인들이 영국인들보다 똑똑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영국의 교육이 한국보다 더 나을 것도 없을 거 같다고 볼 수도 있는데요, 이런 교육은 나중에 학생들이 나이가 좀 더 들어서 진짜로 어떤 분야에 집중하고자 할 때 빛을 발합니다. 즉, 방대하고 얕은 수준의 지식은 없을지 몰라도, 선택된 분야에서 더 창의적이게 사고를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거죠. 제가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봐도, 영국인 학생들과 동양인 학생들의 가장 다른 점은 그런 자세입니다. 선생이 가르치니까, 그냥 그걸 지식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동양인 학생들과 달리, 영국인 학생들은 스스로가 납득할 수 없으면 선생과 싸우더라도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죠. 내가 이런 말하면 멍청해보일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기본적인 우려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영국에서는 다들 대학을 가야한다거나,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좋은 직업 (의사, 변호사 등)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배관공이 될거면 굳이 미적분이 뭔지, 크로아시아가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건지 알 필요도 없고, 그걸 모르는 것에 대해 굳이 수치심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인거죠.
그렇게 직장에 대한 차별의식도 없고, 다들 대학에, 그것도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의식도 별로 없는 영국이지만, 그래도 최근에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대다수의 학생들이 자기 전공분야에 상관없이 금융권으로 빠지고, 제조업의 성장이 더뎌짐에 따라서 공과계열을 권장하는 분위기가 있긴 합니다. 그리고 2007년 금융불황을 계기로 많은 초등학교에서 일찍부터 금융 관련 수업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도 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컴퓨터 수업의 일환으로 전문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습니다.
반면, 영국에는 학교 밖에서 부모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사교육이 극히 드문 편입니다. 왜냐면 사교육에 힘쓸 부모들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아이를 사립 학교에 보내거나 같은 수준의 부모들이 모여사는 괜찮은 수준의 공립 학교가 있는 곳으로 보낼 테니까요;; 영국에는 크게 분류해서 부모가 돈을 내지 않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 (State school)와 부모가 돈을 내고, 교과과정의 운영도 비교적 자유로운 사립학교 (Independent/Private school)가 있습니다. 사립이야 어차피 부모들의 돈을 받고 운영되기 때문에 당연히 교육수준이라든가, 선생님들이 학생을 대하는 태도, 선택할 수 있는 방과후 활동의 범위들이 공립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그러나, 공립의 경우는 그 수준이 천차만별입니다. 영국에서는 살고있는 지역이나 주거환경으로도 계급의 구별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산층 (Middle class)들이 모여사는 공립학교는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고, 방과후 활동도 조정이나 테니스, 전문적인 음악 클라스 등 다양할 수 있지만, 노동층 (Working class)들이 모여사는 곳의 공립학교는 낮은 교육수준 뿐 아니라 선생님들 역시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때가 많습니다 (학생들 대부분 의무라 오는 것일 때가 많고, 부모 역시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별로 의욕이 없는거죠). 그래서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부모들이라면 따로 방과후 학원을 찾아 보낼 바에야 아예 그런 걸 다 제공해 줄 수 있는 학교를 처음부터 찾아 보내는 거죠. 그리고 영국에서는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이면 부모 둘다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일을 하더라도 대부분 저녁 5-6시가 되면 퇴근을 해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주중에 따로 사교육을 받을 시간도 잘 없답니다. 그래도 굳이 사교육이라고 부를만한 걸 꼽자면, 주말에 수영, 축구, 럭비, 발레 등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할 수 있는 운동을 배우거나, 아이들의 성향에 따라 음악 교실이나 미술 교실 등에 데리고 가는 정도인데, 그래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주말은 가족이 함께 보내는 날이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외국어 교육과 관련해서 자기 자식을 어떤 글로벌한 인재로 만들기 위한 엄마들의 노력이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그런건 없습니다.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이름답게 여전히 자기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한 나라입니다. 여전히 산업혁명 때의 철도시설을 계속 보수해가며 쓰고 있는 나라이지만, 그걸 우리 기술이 떨어져서 새로운 걸 못만드는거다, 라는게 아니라, 우리에겐 충분히 그럴 기술이 있지만 우린 전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거다, 라는게 대체적인 영국인들의 생각이니까요. 그리고 영어가 원래 영국의 말인 까닭에 영국에서는 미국식 영어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국어 교육은 Year 3-6 (만 8세부터 11세까지)부터 시작되는데,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배울 수 있지만, 영국인들은 어딜가도 대부분 영어로 소통하면된다, 라는 생각이 있어서 굳이 외국어 교육에 열을 올리지도 않습니다. 사실, 수많은 외국인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국을 찾고, 영국의 젊은이들도 영어 강사로 비교적 쉽게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는데, 굳이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절박함이랄까, 필요성을 못느끼는거죠. 최근에는 중국의 힘이 커짐에 따라 중국어를 배우는 대학생이나 젊은 사람들이 늘고는 있는데, 여전히 대다수의 영국인들에게 중국어란 중국인 음식점이나 배달집을 운영하는 이민자들의 말정도이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배워야 한다거나, 내 아이에게 가르치겠다, 하는 트랜드가 생기는 건 아무래도 아주 나중의 일이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리하자면, 영국에서는 굳이 내 자식이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인기를 끌었던 영국 드라마 'Downton Abbey'에서 나오는 하인들의 태도에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스러움이 엿보이는 것처럼, 영국에서는 직업에 대한 구분은 있어도 귀천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계급의 구분이 확실하다는 건, 단순히 돈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의 수준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하죠. 그러다보니, 아이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교육에 최소한의 관심이 있는) 영국인 부모들은, 그 아이가 사회에서 존중받는 인격체로 자라는 걸 우선으로 두고, 그걸 바탕으로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거나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는다면 좋지만, 굳이 그걸 위해 어떤 방법과 얼마의 돈을 들여서라도 더 열심히 (강제적이라도) 교육(공부)시켜야겠다, 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답니다. 결국에는 아이의 선택이고, 아이의 인생이라는 거죠.
이런 어떻게 보면 쿨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무심한 영국인들의 교육에 대한 태도 뒷편에는, 아마도 '이미 우리는 세계에서 최고다'라는 자부심과 실제로 어떤 분야에서 최고인 인재들을 배출해 낸 그들의 교육 전통에 대한 깊은 신뢰, 한편으로는 다들 그들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 모습에 도리어 다른나라의 언어에 무관심한듯한 자만심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그런 모습들이 좀 (가끔은 재수없으면서도) 부럽기도 하고 말이죠 ㅎㅎ;;;